▲청일전쟁 당시의 서해해전을 묘사한 고등학교 <한국사>의 그림.
비상교육
정조 이전만 해도, 일본은 조선과의 경협을 목적으로 통신사를 에도(동경)까지 초대해서 성대하게 대접하곤 했다. 옥스퍼드대학 제임스 루이스 교수의 추산에 따르면, 통신사를 한번 초대할 때마다 일본은 연간 쌀 수확량의 12% 정도를 쏟아 부었다. 그러던 일본이 정조 집권 후반기인 1794년부터 조선·일본의 공동 속국인 대마도에서 통신사를 대접하겠노라며 태도를 바꾸었다. 더이상 에도까지 불러 큰돈 쓸 필요가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것은 무신정권인 도쿠카와 막부 내에서 조선 멸시 풍조가 고개를 든 탓이었다. 일본이 돌변한 것은 자국 경제에 대한 자신감이 생겼기 때문이다. 임진왜란 이후 조선이 병자호란에 패하고 이런저런 이유로 상대적으로 뒤처지는 사이에, 일본은 막부의 주도로 신속히 경제성장을 이룩했던 것이다.
그러나 일본이 한국을 침략하는 데 필요한 자금을 축적한 것은 그보다 훨씬 뒤였다. 1868년 메이지유신을 계기로 근대화에 나선 후에도, 일본은 주머니 사정이 좋지 않았다. 1869년에 대마도를 합병하고 1879년에 오키나와까지 합병했지만, 소규모 섬나라들을 확보한 것만으로는 '범행자금'을 마련할 수 없었다.
그런 일본에게 행운이 생긴 때가 1894년이다. 1876년부터 일본에 시장을 개방하고 1882년부터 미국·영국·독일 등 서양열강에 시장을 내준 이래, 조선의 상권은 영국제 면직물을 앞세운 일본·중국 상인들에 의해 급속도로 잠식되었다. 그런 상태에서 5백 년 조선왕조의 내부 모순도 함께 심화하여 갔다.
안과 밖으로부터의 모순을 해결하고자 궐기한 것이 1894년의 동학농민군이다. 농민군과 정부군의 전쟁은 전자의 승리로 끝나는 듯했다. 그러나 고종 임금이 청나라 군대를 끌어들이면서부터, 상황은 농민군과 고종 어느 쪽도 손을 쓸 수 없는 방향으로 전개되기 시작했다.
청나라군이 조선에 들어오자, 일본군도 덩달아 조선에 들어왔다. 청나라군은 농민군을 진압하러 왔지만, 일본군은 농민군과 조선 정부군과 청나라군을 죄다 진압하러 왔다. 이렇게 조선에서 만난 두 나라는 서로 전쟁을 벌이고 결판을 낸 뒤에야 돌아갔다(청일전쟁).
청일전쟁 이전만 해도, 일본은 외형상으로 청나라에 뒤졌다. 1884년에 김옥균이 일으킨 갑신정변에서 청나라군이 일본군을 꺾고 조선 정국을 장악한 이래, 일본은 청나라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그런데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것은 일본이었다. 농민군과 조선 정부군이 합심해서 외국군 철수를 요구하고 청나라 역시 전쟁을 꺼리는 상황 속에서, 일본은 청나라를 전쟁으로 끌어들여 승리를 거두었다.
1886년 이래 집중하여 육성된 일본 해군이 청나라 정예 함대인 북양함대를 서해에서 격파한 것이 승부의 분수령이 되었다. 이 사건은 일본이 아시아 이류에서 세계 일류로 도약하는 발판이 되었다.
1895년 청일전쟁 후 마관조약 체결... 전쟁배상금 3억 6천만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