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의 빈자리

등록 2012.06.27 16:20수정 2012.06.27 1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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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콩달콩' 살아간다는 말이 있습니다. 재미있게 살아간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말 속에는 늘 좋은 일만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때는 기분 상하는 일, 슬픈 일도 있다는 뜻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또 화려하고 고귀한 삶이 아니라 아주 평범한 서민적 삶을 살고 있다는 의미도 조금 비칩니다. 그래서 전 부부 관계에서 사전에 등재되어 있지도 않은 이 말을 즐겨 쓰고 있습니다.


오늘(6월 27일)은 수요 노년부 낮 예배가 있는 날입니다. 걱정이 태산입니다. 고정 멤버 중 1순위 아내가 빠졌기 때문입니다. 고정 멤버 1순위는 다른 뜻이 아닙니다. 아내가 예배 뒤 할머니들 식사를 책임지는 사람이거든요. 10여 분의 할머니들 중 예배보다도 아내가 만든 점심을 더 기다리는 분도 있습니다. 따뜻한 밥에 된장국 그리고 텃밭에서 거둔 몇 가지 즉석 반찬은 싱싱하면서도 향기롭습니다.

그것을 오늘은 먹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아내가 출타중이기 때문입니다. 처음엔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노인분들을 섬길 수 있는 유용한 기술이 될 것 같다는 판단에 가도록 했습니다. 결정적으로는 아내의 마음을 움직이는 계기가 있었습니다. 지난주 금요일입니다. 집집마다 전도지를 붙이다가 한 할머니를 발견했습니다. 우리의 도움을 절실히 필요로 하는 할머니였습니다.

그분을 사택으로 모시고 와서 목욕을 시켜드리면서 90세 노인의 발이 너무 험한 것을 모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농촌에서 평생 농사일에 매달려 이리 뛰고 저리 뛴 결과입니다. 이분들을 위하여 발 맛사지를 배우면 좋겠다는 생각을 강하게 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와중에 다수교회 사모님으로부터 2박3일 일정으로 발 맛사지 교육이 있는데 함께 가자는 전화가 아내에게 왔습니다. 그날이 지난 월요일부터 오늘 오후까지입니다.

아내가 없어 제기되는 문제는 당장 수요 노년부 예배 뒤 점심입니다. 별별 생각을 다 해 보았습니다. 중국집에 가서 자장면을 시켜 함께 먹는다에서부터 면 종류를 사다가 끓여 드리는 것, 아니면 아는 성도에게 부탁해서 하루 점심 식사를 부탁하는 것도 우리의 고민 안에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흔쾌히 이거다 하는 것이 도출되지 않았습니다. 모두 하나 이상씩의 걸림돌들이 있었습니다.

그때 생각해 낸 것이 김밥으로 해결하는 것이었습니다. 김천역 건너편에 맛있는 김밥집이 있다는 것입니다. 김밥이라면 설거지 할 것도 없고 비교적 깨끗하게 먹고 처리할 수 있을 것 같다는 것입니다. 단무지에 국물까지 곁들여 주기 때문에 그것만큼 좋은 것이 없을 것 같습니다. 대안을 마련해 주고 아내는 훌쩍 떠났습니다. 그래도 못내 마음을 놓을 수 없는지 전화를 걸어 수시로 걱정을 합니다.


오늘 아침엔 좀 일찍 서둘렀습니다. 김천역 앞까지 가서 점심 식사용으로 김밥을 준비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역시 김밥 집은 제가 예상한 것보다 훨씬 더 완벽하게 준비를 해 주었습니다. 김박 20줄을 시키니 단무지에 국물까지 비닐봉지에 넣어 주었습니다. 앞 도로가 주차 금지 구역이라 한 바퀴 무료하게 돌고 오니 종이 상자에 김밥 등을 잘 꾸려 놓았습니다. 좀 묵직하기는 했어도 그것이 오히려 마음을 안심시켰습니다. 김밥의 무게는 배 부름과 비례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돌아와서 사택 거실에 상을 펴고 미리 김밥을 차려 놓았습니다. 단무지를 두 상 가운데 놓고 젓가락과 김밥을 두 줄씩 가지런히 배치했습니다. 또 후식으로 먹을 자두와 복숭아 참외를 한 광주리 상 위에 올려놓았습니다. 이것들은 모두 저와 가까이 지내는 분들이 선물로 보내온 것입니다. 예배 마치고 들어와서 국만 데워 올리면 점심 식사 차림이 끝날 수 있도록 만들어 두었습니다.


김종말 집사님 등 몇 분은 걸어서 교회에 오십니다만 다른 할머니들은 거동이 불편하시기 때문에 제가 모시러 가야 합니다. 만나는 할머니들마다 아내 안부를 물었습니다. 사모님은 어디 가셨냐구요. 늘 함께 다니다가 저 혼자 움직이니 저보다도 할머니들이 더 어색하게 느껴지는 모양입니다. 교육 받으러 갔다고 했는데도 할머니들의 반응이 시큰둥하십니다. 사모님이 없는 수요 낮 노년부 예배는 재미가 없다는 식입니다.

저는 일부러 재미있는 분위기를 연츨하려고 애를 썼습니다. 예배 전 율동으로 몸 푸는 서비스를 오랜만에 했습니다. 노인 분들은 대체적으로 건강이 좋지 않기 때문에 건강에 대한 이야기를 좋아하십니다. 손뼉 치기는 혈액 순환을 도와 건강을 지켜주는데 필요하다는 내용을 먼저 전했습니다. 그리고 손뼉 치기, 손등 치기, 손가락 끝으로 귀 바로 위 머리, 뒤통수, 정수리 등을 차례로 치는 동작을 했습니다. 사실에 부합하는지 여부와는 상관없이 손뼉으로 몸 요소요소를 치면 하체에 온기가 돌고 상체 특히 오장육부의 피 순환을 도와 몸이 풀린다는 얘기까지 덧붙이니 할머니들은 잘 따라 하십니다.

한 술 더 떠 예배 전임에도, 서로 등을 잡게 한 후 '아리랑'을 부르며 앞 사람 안마를 해 주게 했습니다. 다음엔 반대로 돌아앉아 이젠 '밀양아리랑'을 부르며 앞에 분 어깨를 주무르게 했습니다. 찬송가는 힘들게 부르는 할머니들이 우리 민요는 거침없이 불러대십니다. 제게 아물아물한 밀양 아리랑 가사까지 정확하게 큰 소리로 이끌어 내십니다. 젊으셨을 때 한 가락 하신 실력입니다. 이렇게 몸과 마음을 풀고 난 뒤 우리는 예배를 드리고 사택 거실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사모님 없을 땐 그냥 점심 식사 하지 않고 집으로 돌아가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실제로 한 두 할머니는 그냥 가시겠다는 겁니다. 저는 그냥 가시면 준비해둔 식사는 버려야 한다며 할머니들을 사택으로 안내했습니다. 상 위에 김밥과 반찬이 가지런히 놓여 있는 것을 보고 정말 사모님이 깔끔하게 차려 놓고 가셨다면서 여느 때와 다름없이 자리를 잡고 앉았습니다. 제가 분위기 깨는 질문을 던졌습니다. 식사 시간에 기도하지 않고 드시는 분 손들어 보시라고 하니 여기저기서 깜박 잊고 안 할 때가 많다며 이실직고했습니다.

저는 국을 데워 일일이 할머니들 앞에 따라 드렸습니다. 김밥도 가끔은 먹을 만하다며 맛있게 드셨습니다. 두 개씩 배당된 김밥을 하나만 드시고 다른 하나는 가지고 가야겠다고 했습니다. 저는 수대로 준비된 참외도 김밥과 같이 댁으로 가지고 가서 드시라며 권했습니다. 할머니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각자 가방에 정성껏 담았습니다. 선물로 들어온 것을 이렇게 나누어 가지니 배가 몇 갑절 더 불러오는 것 같은 기분입니다. 아내가 있으면 비닐 팩에 싸서 가방에 넣어 드릴 텐데 저는 그렇게까지는 못 하겠습니다.

할머니들을 댁까지 모셔다 드릴 때 이구동성으로 하시는 인사말이 있습니다. '목사님 애만 먹이고…. 감사합니다'가 그 인사말입니다. 오늘은 이 인사말에 하나의 말이 더 붙었습니다. 사모님 없이 목사님 혼자 수요 낮 노년부 예배를 잘 드렸다는 칭하(稱賀)의 말일 것입니다. '목사님 애만 먹이고…. 특히 오늘 더 감사합니다.' '특히'라는 말이 첨가된 것은 아내의 몫까지 잘 해냈다는 뉘앙스가 깔려 있습니다.

있을 땐 모르다가 없으면 두드러지게 표 나는 사람이 진정한 일꾼입니다. 아내가 그렇습니다. 함께 있을 땐 잘 모릅니다. 여기엔 저의 이기심이 많이 반영되어 있기 때문에 그럴지 모릅니다. 아내의 빈자리가 유난히 크게 보이는 오늘 하루였습니다. 세월이 더 흐르면 함께 하고 싶어도 하지 못하고 헤어져야만 할 텐데 걱정입니다. 그럴 때를 대비해서 함께 있을 때 잘 해야겠다고 다짐합니다. 아내가 있는 자리에서 남편과 목회자로서의 역할을 잘 할 때 반비례해서 아내의 빈자리가 작게 보이게 될 것 같습니다.
#노년부 예배 #점심 식사 #아내 #김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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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 향기 그윽한 김천 외곽 봉산면에서 농촌 목회를 하고 있습니다. 세상과 분리된 교회가 아닌 아웃과 아픔 기쁨을 함께 하는 목회를 하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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