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수산책로 한켠에서 ‘별도봉 비가’를 부르고 있는 최상돈 선생님과 묵묵히 듣고있는 수강생들
박정미
왔던 길을 다시 올라가 장수산책로 가장자리에 둘러앉아서 첫 번째 음악 시간을 가졌다. <화북천의 기억>에 이어 <별도봉 비가>까지 꺼끌꺼끌하고 바랜듯한 그의 목소리를 듣고 있자니 다들 가슴이 먹먹해지고 모가지가 무거워져 버렸는지 내내 고개를 발치에 떨군 채로 앉아 있었다.
다 흘려보냈다 저 바다로꿈속 기억마저 흘려보냈다.누구를 탓하랴 세월을 탓하랴 옛 이야기 궁금해도 생각이 나야 말이지그래 너희라도 그 이야기 내게 들려주렴물로 뱅배애애앵 돌아진 섬에 눈밭에 꿩사냥 가던 얘기세월을 지나서 놀러갔었지세월 저편 어딘가에 사름이 죽어 있었지이젠 너희들이 그 이야기 잘 좀 전해주렴물로 뱅배애애앵 돌아진 섬에 눈밭에 꿩사냥 가던 얘기호-- 호-- 호- 호-- 하며 눈밭에 한라산 살던 얘기- 최상돈, <화북천의 기억 (세월을 건너다)>끝이 없는 연휴를 보내고 있는, 돌아오지 못한 수많은 영혼침묵의 세월을 강요당해 살다가 물어봐도 물어봐도 모른다 모른다 하던 4·3 당시를 살아남은 분들이 이제는 앞다투어 내가 증언할 수 있다고 하지만, 침묵하던 그때만 해도 "그래 너네가 알고 있으면 나한테 고라 봐라(나에게 말해 봐라)" 그리고 "그래 알고 있구나, 그러면 내가 더 말해줄게, 이제는 너네가 잘 전해라, 내가 말해줄 테니…"라 했었다.
노래 <화북천의 기억>은 '4·3을 알리려 했던 분들과 4·3에서 실제 살아남은 분들의 이러한 만남, 그리고 당시 오갔던 증언들이 2006년 화북천 인근에서 유해로 발견된 그분들의 말씀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에서 만들어지게 되었다.
4·3아카데미 수강생들은 노래가 끝나자 무겁게 내려앉은 공기를 털어내고, 다시 별도봉 정상으로 또박또박 걸어 올라갔다. 앞으로 가까워져 오다 사라지는 사람들을 교차하여 40년대 말의 정점에 가까워졌다.
뒤에는 한라산, 앞에는 제주바다가 자리하고 있는 그곳에서 두 번째 음악 시간이 시작되었다. 최씨는 "제주 4·3연구소 소장으로 있었던 고창훈 교수가 쓴 책 내용 중에 노랫말이 쓰여 있었는데, 너무 좋아서 1992년도에 <한라산이여> 라는 제목으로 노래를 만들었다"며 통기타를 가슴께에 그러안고 기타 줄을 힘차게 밀어냈다. 마치 그 음성처럼 마음마저도 까끌까끌해져 버린 것은 아닐까 염려됐는지 그의 마음을 보듬어 주려는 듯, 수강생 어머니, 아버지, 할머니, 할아버지는 연신 박수를 쳐주셨다.
"통일운동의 역사라는 그런 표현보다도 당연히 우리는 하나의 나라, 하나의 민족이 갈라지려 하고 서구 열강들의 권력에 대항하려 했던 몸부림의 차원에서 생각해보면 제주도의 4·3은 3·1운동 이상의 의로운 역사가 아닐까 생각한다. 그렇게 생각하면 그저 슬프기만 한 역사는 아니지 않겠느냐"며 최씨는 강단진 목소리로 박수에 회답하였다.
4·3 당시 돌아오지 못한 수많은 영혼은 오늘까지도 끝이 없는 연휴를 보내고 있다. 최씨는 그 영혼들의 마음을 보듬으며 <이어도 연휴>를 열창했다. 이어달리기 하듯 따스한 기운은 사람에게서 사람으로, 또 시간의 흐름을 넘나들었고, 음악 시간은 클라이맥스에 치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