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곡마을 주민들이 농민인문학 강좌에서 강사의 강의를 귀담아 듣고 있다.한 여름 더위를 피해 농민도서관에 모인 농민들이 강사의 강의를 들으며 농민의 삶에 대한 새로운 상상을 키운다. 죽곡농민열린도서관의 농민인문학 강좌는 여름과 겨울 농한기를 이용해서 공부하는 방식으로 지식과 농민운동을 결합한 모델을 만들어 보고 있다.
김재형
2004년 여름에 죽곡농민열린도서관은 주민들의 자발적인 의지로 개관했습니다. 자기 집에 있던 책을 들고 나오고 만 원, 2만 원 후원금도 내고 시간을 내어 청소하고 정리하고, 어떻게 운영해야 할지 지혜를 모으는 과정까지 우리 사회에서 보기 드문 자발성에 기초한 문화 운동을 시작한 것입니다.
안에서 스스로 나오는 에너지가 고갈된 농촌 사회에서 이런 자발성이 오래 가기는 힘들었습니다. 어딘가 외부에서 오는 지원이 없으면, 어떤 사건을 일으키지 않으면 이런 자발성이 오래가지 못한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꼈고, '희망의 작은 도서관 공모'에 응모했습니다. 운이 좋았던 거죠. 한 번도 상상해 보지 못했던 상금을 받았습니다. 그 돈으로 건물을 새로 짓고 자발성이 모이면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지 확인할 수 있었던 게 이후에도 이어지는 힘이 되었습니다.
농촌에서 농민운동을 하면서 늘 고민하는 게 '어떻게 하면 자발성을 일으키는가?'입니다. 자발성은 '스스로 일어나는 힘'인데 이것을 일으켜야 하는 게 이 고민의 모순입니다. 도시였으면 좋은 생각과 가치, 활동이 있으면 사람들은 서로 모여들고 마음과 힘을 나눌 수 있지만 농촌은 그게 쉬운 게 아닙니다. 새로운 생각은 기존에 형성된 단단한 고정관념과 사회적 벽에 부딪치고, 도움을 받을 사람을 얻는 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런 사회에서 변화를 불러오기 위해서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오랫동안 해서 조금씩 조금씩 변화를 일으키고 저항감없이 받아들이도록 하는 겁니다. 작은 변화 하나도 대부분 오랜 시간의 결과입니다.
농민에게서 희망의 싹 터야 오래가는 변화 시작돼지난해 죽곡마을시집을 만들었습니다. 이 생각을 한 지 8년만에 현실이 되게 한 겁니다. 제가 중고등학교 학생이었을 때 학교, 교회, 마을 등등 다양한 단위로 연말이면 문집을 만들었던 기억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양한 문집을 모아서 전시하고 서로 선물하는 것이 연말의 자연스런 문화 중 하나였습니다. 그런 문집을 만들어 보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문집을 만드는 사회적 흐름은 이미 없어졌고, 농촌의 농민들 대부분은 글을 쓰지 않은 지가 너무 오래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문집을 만들기 위해서는 노력이 많이 들어가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이런 노력을 지원할 수 있는 재정 후원이 필요했습니다. 또 한번 운이 좋았습니다. 많진 않지만 곡성군에서 결정해 준 '청소년 공부방' 사업이 힘이 되었습니다. 노력을 집중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었고 전남문화예술재단의 '마을시집 지원 사업'을 마중물로 활용하였습니다.
건물을 짓거나, 책을 만드는 일도 어떻게 보면 단기적 변화일 수 있습니다. 이런 일은 돈이 있거나 기획을 잘하면 되는 일입니다. 변화는 더 근원적인 지점에서 일어나야 합니다. 우리를 둘러싼 외부를 바꾸고 가시적인 성과를 내는 것보다 더 근원적인 일은 자신을 바꾸는 일입니다.
공부를 해야 겠다는 생각을 한 이유는 근원적 변화를 일으키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한 사회에서 일어나야 할 가장 근원적인 변화는 농업, 농촌, 농민에게서 시작해야 한다는 느낌도 들었습니다. 땅에 뿌리박고 있는 농민에게서 희망의 싹이 움터나야 큰 나무처럼 오래가는 변화가 시작됩니다. 도시에서 일으키는 많은 희망의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뿌리가 얕은 편입니다. 오래가지 못하고 시들어 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왜냐면 도시에서 희망을 이어가기 위해서는 비용과 노력이 너무 많이 듭니다. 농촌은 돈이 조금만 있어도 유지할 수 있고, 어떤 경우에는 돈없이 할 수 있는 일도 많습니다. 우리는 그동안 대부분의 일을 돈없이 해왔습니다.
처음 공부를 해야 겠다고 마음먹었을 때에도 서로 돌아가면서 책읽고 생각을 나누는 것에서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정도로는 힘이 모이지 않는 걸 느낄 수 있었습니다. 욕심을 부린 건데 규모가 큰 공부 모임을 조직해 보고 싶었습니다. 곡성군에서 기획했던 건데 매달 한 번씩 '심청 강좌'라는 이름으로 지명도가 있는 지식인을 초대해서 공부하는 일을 몇 년간 한 적이 있습니다. 군수가 바뀌면서 중단되었는데, 한두 번 하는 게 아니라 오랫동안 하나의 가치에 기반을 두고 공부를 꾸준히 이어가는 규모있는 강좌를 읍내가 아니라 면소재지 마을에서 할 수 있으면 그 사실 자체만으로도 사회적 의미를 가지고 새로운 상상을 불러올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매달 한 명 기준으로 지명도가 있는 지식인을 초대하는 농민이 중심이 된 자발적인 강좌 기획' 이것이 농민인문학의 기본 개념입니다. 농촌의 특성을 살려 매달 한 번이 아니라 여름과 겨울 농한기를 이용한 집중 강좌라는 현실적 판단을 하였고, 여름과 겨울 각각 여섯 분 일년 열 두분의 선생님을 모시는 농민인문학 강좌는 이제 3년째 하고 있습니다. 2010년 여름에 시작한 이 강좌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강사 추천을 운영위원과 지역 주민에게 개방해 두고 있습니다. 지역주민들이 자유롭게 추천하고 운영위원회에서 평가하고 저는 실무적 섭외를 담당합니다.
이런 과정을 거치다 보니 강사의 폭이 정치적으로는 새누리당에서부터 진보신당까지 펼쳐지고, 하는 일로 봐도 농민에서 국회의원까지 다양합니다. 지역 주민들로서는 내가 추천한 사람이 공개적인 강의를 하는 것도 의미있고, 언론에서 보던 사람을 눈 앞에서 만나는 재미도 있습니다. 책으로 읽었던 저자를 만나 싸인을 받기도 하고, 청소년들은 멘토를 얻는 기회이기도 합니다. 농민인문학 강좌는 공부라기 보다는 지식을 기반으로 하는 하나의 문화 행사처럼 즐거움과 교양을 동시에 얻는 축제의 성격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물론 이런 민주적 과정과 축제라고 해서 다들 좋아하는 건 아닙니다. 변화는 늘 견제에 시달려야 하는 것이 운명입니다. 그러나, 수비없이 혼자하는 축구가 재미없듯 이런 견제를 잘 피하고 지혜롭게 상황을 읽으면서 새로운 가능성을 열게 되면 그동안의 견제가 오히려 일을 만들어 가는 과정에서 도움이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지식'을 거점으로 한 새로운 농민 운동 필요농촌에서 알게 된 것이 꼭 돕는 것만이 도움을 받는 것이 아니라 어떨 때는 적당히 견제받는 것도 생각을 더 깊이 하게 되고 지나치게 과잉하지 않게 된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어차피 지나치게 한다고 해서 성과가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적당한 선에서 그치는 것이 알맞은 노력으로 알맞은 성과를 얻는 방법이었습니다.
그동안 농민인문학 강좌에는 도법스님, 오연호 <오마이뉴스> 대표, 국회의원 되기 전 이학영 와이엠씨에이 총무, 김규항 <고래가 그랬어> 발행인, 김민해 풍경소리 발행인, 이석형 전 함평군수, 김효석 국회의원, 이정현 국회의원, 백무산 시인, 김성범 도깨비마을 촌장, 한원식 자연농업 농부, 민승규 농촌진흥청장, 김상봉 전남대 교수 등 우리 사회에서 이슈를 만들어 내는 쟁쟁한 지식인과 실천가들이 참여해 왔습니다.
한국의 면단위 농촌 마을에서 이런 분들을 초대해서 꾸준히 강좌를 개설한 사례 자체가 없을 겁니다. 이번 여름 강좌에도 안도현 시인, 배병삼 영산대 철학교수, 백현기 전 한겨레신문 편집국장, 강위원 여민동락 대표, 김선동 국회의원, 기덕문 선생님 등 훌륭한 지식인과 실천가들이 강의하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