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미의 '왕산로'. 수출기념탑에서 왕산 기념관에 이르는 거리다.
장호철
이 지역에서 왕산을 기리는 형식도 비슷하다. 왕산의 생가가 있는 임은동에 그의 아호를 딴 거리 '왕산로'가 있고, 또 '왕산 허위 선생 기념관'이 세워져 있다. 왕산로는 서울에도 있는데 이는 왕산이 13도 창의군 참모장이 되어서 진군했던 곳을 기념해 붙인 이름이다. 왕산기념관 아래에는 2007년 3월에 개교한 '왕산초등학교'도 있다.
상모동에 단장된 박정희의 생가가 숭배자들의 발길을 모으고 있는 것과는 달리 왕산의 생가는 남아 있지 않다. 그 터에 조형물 몇 개로 왕산기념공원이 조성되어 있을 뿐이다. 물론 찾아오는 사람도 거의 없다. 생가터를 굽어보고 있는 임은동 앞산에 세운 왕산기념관이 그나마 1세기 이전의 역사를 환기해 줄 뿐이다.
박정희의 삶과 시대는 불과 30년 전의 역사, 현대사의 그리 멀지 않은 한 장면이다. 그러나 왕산의 시대는 일백 년 저편, 일제 강점기 이전의 아스라한 근대사에 불과하다. 박정희의 그것이 현재형의 역사라면 왕산의 그것은 이미 화석이 되어 버린 이야기에 그칠 뿐이다.
왕산의 항거에도 이 땅에 이어진 세월은 망국과 통한의 역사, 무려 서른다섯 해를 넘는 질곡의 시기였다. 그러나 박정희의 치세는 민주주의가 압살된 18년 독재가 아니라 사람들에게 '조국 근대화'의 시기, '보릿고개'를 넘기게 한 이른바 '민족중흥'의 시대로 기억되기 때문이다.
타관살이를 마감하고 구미로 들어온 지난 1월 말에 나는 아내와 함께 왕산기념관을 찾았었다. 일찍이 안동지역의 독립운동가를 더듬어 보는 과정에서 나는 왕산을 만난 바 있었다. 임정의 초대 국무령을 지낸 석주 이상룡의 손부(이병화의 처) 허은 여사가 왕산의 재종손녀였던 것이다.
기념관에는 그의 체취가 남은 유품이나 유물은 많지 않은 대신 그의 생애와 독립운동사 등의 보조 자료가 비교적 잘 전시되어 있었다. 1세기 이전의 역사적 인물을 기리는 기념관이 갖는 한계야 뻔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박정희'로 상징되는 이 공업도시의 한쪽에 그 이전의 역사이긴 하지만, 항일 근대사를 오롯이 기억하게 한 것만으로 2009년도에 세운 이 기념관의 의의는 각별해 보였다. 영상 추모관과 시청각 교육장을 갖춘 기념관 2층은 열람실이었다. 2만 권의 장서를 갖추었다고 하는데 열람실에는 초등학생 몇 명이 눈에 띌 뿐이었다.
왕산 허위, '을미의병'부터 '서울진격작전'까지왕산의 항일은 창의(倡義)로부터 시작된다. 그가 처음으로 의병을 일으킨 것은 1896년, 1년 전의 명성황후 시해사건과 단발령 반포로 전국에서 창의가 이어지던 때의 이른바 '을미의병'이었다. 인근 유생들과 김천에 수백의 장정을 모아 군사를 일으키니 이때 그의 나이 마흔둘이었다.
그가 일시 벼슬에 나아갔다가 다시 창의한 것은 1904년 일본이 '황무지 개척권' 위임조약 승인을 요구하면서부터였다. 왕산은 이상천, 박규병 등의 관료들과 함께 전국에 배일(排日) 통문을 돌려 일제 침략상을 규탄하고 전 국민의 분발을 촉구하였다.
"앉아서 망하기를 기다리느니보다 온갖 힘을 다하고 마음을 합하여 빨리 계책을 세우자. 진군하여 이기면 원수를 보복하고 국토를 지키며, 불행히 죽으면 같이 죽자. 의(義)와 창(槍)이 분발되어 곧 나아가니 저들의 강제와 오만은 꺾일 것이다. (…) 비밀히 도내 각 동지들에게 빨리 통고하여 옷을 찢어 깃발을 만들고, 호미와 갈고리를 부숴 칼을 만들고(…) 우리들은 의군을 규합하여 순리에 쫓게 되니 하늘이 도울 것이다."1905년 왕산은 한일의정서(1904)를 반대했다는 이유로 일제에 의해 최익현과 함께 넉 달간 구금되었다. 그해 11월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왕산은 경기도 연천에서 김태묵, 왕회종 등과 함께 다시 기병(起兵)한다. 왕산의 의병은 포천에서 일본군과 접전을 벌이고, 철원읍 점령을 시도했다. 이 같은 무장투쟁 이외에도 왕산은 <대한매일신보>에 격문을 실어 일제 침략을 고발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