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당시 대구사범학교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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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미 보통학교를 졸업한 박정희는 1932년 4월 1일 제4기생으로 대구 사범에 입학했다. 바로 그해 4월 현준혁 교사는 학생들과 함께 항일 동맹휴교를 주도했다. 1932년 11월 10일 자 <중앙일보> 보도에 따르면, 대구지방법원에서 "학생에 적화 선전한 적색 3대 결사 사건, 오는 14일에 공판 개정, 피고 현준혁 등 25명"이라는 내용이 나온다. 이른바 '현준혁사건'으로 현준혁은 6년간 복역하였고, 교직에서도 파면되었다. 출옥 후 그는 노동운동을 하다가 재수감되었으며, 이후 조선공산당에 들어가 활동하다가 해방 직후 평양에서 암살당했다.
박정희와 대구 사범 동기생인 언론인 황용주(전 부산일보 주필·부산문화방송 사장, 2001년 작고)는 99년 정신문화연구원 현대사연구소가 펴낸 <격동기 지식인의 세 가지 삶의 모습>에서 "처음 좌파에 눈뜬 것은 대구 사범 재학시절에 발생한 '현준혁 사건'이 첫 계기였고, 이를 계기로 <공산당선언>, <자본론> 등의 서적을 '한 달 용돈을 다 털어서' 사서 읽곤 했다"고 증언했다. 좌파 지식인으로 불리는 황씨는 5·16 당시 민간인 신분으로 박정희를 적극 도운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다.
황씨는 대구 사범 재학 시절 일본 교토대 좌익교수 가와카미 하지메(河上肇)가 쓴 <빈보모노가다리(貧乏物語)>(유물론과 맑스주의를 알기 쉽게 풀어쓴 해설서)를 읽고 감동받았다고 증언했다. 지난 97년 당시 분당 자택에서 가진 필자와의 인터뷰에서 황씨는 "당시 학생이나 지식인들 사이에서는 이 책을 읽는 것이 유행이었다"고 증언한 바 있다. 단언할 수는 없지만, 황씨와 동급생인 박정희도 이 책을 읽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면 박정희 역시 이때 처음 '좌파'를 접한 셈이다.
다만 이때 박정희가 '현준혁 사건'을 통해 접한 '좌파'는 이념적 성향보다는 민족적 성격이 강했다고 할 수 있다. 일제하 민족진영 내에는 좌파계열도 있었고 이들의 투쟁은 반제(反帝), 반일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당시 지식인들 가운데 좌파 경향은 하나의 사조(思潮)였고, 시대적 울분을 표출하는 창구로서의 역할을 하기도 했다. 대구 사범 '독서회사건' 연루자들은 모두 항일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박정희가 대통령 시절 정부로부터 독립유공자 포상을 받았다.
'좌파지식인' 친형 박상희의 죽음과 분노
박정희는 5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는데, 여러 형제 가운데서도 바로 위의 박상희(朴相熙, 1906~1946)를 유독 존경하고 따랐다. 구미 보통학교를 졸업한 박상희는 구미지역에서는 유지급에 속하는 인물이었으며, 일제하 좌우합작 민족단체인 신간회에 참여하였다. 1934년 <조선중앙일보> 구미지국장, 1935년에는 <동아일보> 기자 등 언론인으로도 활동하였고, 일제 말기에는 비밀결사 단체인 '건국동맹'에도 가담하였다. 그의 딸 박영옥은 김종필(JP) 전 총리와 결혼해 그는 JP의 장인이기도 하다.
좌파 지식인이자 민족적 의기를 갖고 있었던 박상희는 당시 구미 지역에서 존경받는 인물이었다. 8·15 해방 무렵 구미보통학교 교사로 있으면서 박상희를 따랐던 송재욱의 증언에 따르면, 박상희는 구미 선산경찰서에 예비검속(혐의자를 미리 잡아 놓는 일) 돼 있다가 유치장에서 해방을 맞았다고 한다. 해방 이튿날 박상희는 마을청년들을 이끌고 일본인이 경영하던 통운회사 건물을 인수하여 '건국준비위원회 구미지부' 간판을 내걸고는 당시 구미보통학교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 무장해제도 지휘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