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저지 경찰차적절한 순간에 나타난 경찰차는 라이더를 위험에서 구해주었다.
최성규
급하게 마음 먹지 말고 처음으로 돌아가라. 마음에 없는 말을 억지로 크게 떠들어대며 페니어백을 떼내고 자전거를 옆으로 눕힌다. 한국에서 정비를 배울 때 어깨 너머로 익혔던 팁이 있다.
보통 펑크를 때우려면 바퀴 자체를 떼내야 하지만 뒷바퀴는 앞바퀴에 비해 시간과 노력이 배로 든다. 그 상태에서 튜브만 밖으로 살짝 빼낸 다음 찢어진 부분만 펑크 패치로 때우고 다시 집어 넣는 방법이 있다. 고무풀을 바르고 패치를 붙인다. 펌프로 바람을 넣었다. 팽팽해지는가 싶더니 피식 공기가 새어나온다. 찢어진 곳이 한 두 군데가 아니다. 덕분에 아까운 펑크패치만 3개를 소모했다. 가게에서 사지 않고 인터넷으로 주문했던 저가 펑크패치는 달라붙지도 않았다.
어쩔 수 없이 뒷바퀴를 분해한다. QR을 풀고 뒷기어변속기와 뒷바퀴를 분리한다. 해는 저물어가고 바퀴 없는 자전거만 내 앞에 덩그러니 놓여 있다. 정비를 꼼꼼히 배워두길 참 잘 했다. 혹시 타이어에 유리조각이 박혀 튜브를 갈아 끼워도 소용없을까 걱정했지만 그 정도 불행은 찾아오지 않는다.
이런 우여곡절을 겪고 뉴와크(newark)로 들어서서 잠잘 곳을 물어보다가 그 부부와 맞닥뜨린 것이다. 지금껏 풀라스키 스카이웨이를 지나간 사람은 내가 처음이란다. 하물며 자전거 라이더는 더 이상 말할 필요도 없겠다. 그러더니 걱정스런 눈빛으로 큰 길을 경계로 반대쪽은 우범지대라고 경고했다.
"미국은 안전한 곳과 아닌 곳이 극명하게 갈려. 소득 수준에 따라 다른 거지. 우리나라의 문제점이기도 하고. 뉴와크는 미국 내에서도 범죄율이 가장 높은 지역 중 하나야. 물론 낮에는 괜찮지. 아침 일찍 그 지대를 지나가면 문제는 일어나지 않아. 부랑자들이나 범죄자들은 술에 곯아 떨어졌거나 게으르니까. 밤에는 사정이 다르지. 걔들이 일어나서 거리를 서성거리거든."나 같은 한국인 여행자는 특히 'Stand out'(눈에 띄다) 된단다. 범죄의 대상이 된다는 말이냐고 하자 고개를 주억거린다. 심각해지는 부부의 얼굴을 보며 불안한 마음이 가시지 않는다. 이들을 무조건 붙잡아야 한다며 내 본능은 외치고 있었다. 한참 얘기를 나누던 둘은 가져온 트럭에 자전거를 실을 수 있다고 했다. 수납공간이 많은 토요타 트럭이다. 일제는 안 쓰지만 오늘만큼은 일반 승용차가 아닌 트럭이 너무 감사하다.
부부는 나를 한적하고 아늑한 별장에 내려주었다. 안전한 지역에 자리잡은 숙소. 연회실에서 파티가 열리는지 백인 남녀 커플들이 뒤엉켜 춤을 추고 있다. 마음 속의 긴장이 눈 녹듯 풀린다. 친절했던 미국인 아저씨는 2년 전에 들렀던 한국만큼 미국이 안전하지는 않다며 메일 주소을 알려주었다. 잠자리에 들면서 그가 내 상황에 빗대어 가르쳐준 영어 표현을 되새겨 보았다. dodge one bullet. 총알을 잽싸게 피하다. 이번 총알은 아주 큰 총알이었다.
2012. 5. 19(토)Kenilworth, NJ, United States - Morristown, NJ, United States16 mile ≒ 25.7 km어젯밤 미국인 부부가 알려준 길을 따라 경로를 잡는다. 차는 없고 보도는 있으며 아무데서나 캠핑을 해도 될 정도로 안전하다는 최고의 코스. 대도시에서 벗어나 시골로 갈수록 범죄율이 낮아지나 보다. 미국은 큰 도시 이외 지역에는 가까운 식료품점이나 공원에 가려 해도 거리가 몇 마일은 족히 된다. 남 등쳐먹는 인간들도 그만큼 살기 팍팍하겠다.
모리스 애비뉴(moriss avenue)를 쭉 따라가다 특정 신호등부터 차들이 일방향 통행을 하는데 그 직전에 왼쪽 다리를 이용해 옆 차선으로 갈아타면 다시 정면으로 뻗은 모리스 애비뉴가 나온다. 그 길은 서밋 애비뉴(summit avenue)로 명칭이 바뀌었다. 서밋 타운(summit town)이 근처에 있다는 뜻. 한가한 도로. 제한속도는 35마일. 간만에 느껴보는 편안함이다. 적절한 내리막길이 시원함을 준다.
파사익 공원(passaic park)가 나타났다. 작은 다리 밑으로 시냇물이 흐른다. 순간, 순천 선암사 승선교가 떠올랐다. 낯선 땅에서 사소한 데서 동질감을 느끼고 싶은 마음이다. 작은 언덕을 올라서는데 또 다시 펑크다. 근처 짐(Gym)에 자전거를 대놓고 수리에 들어간다. 마음이 즐거울 리는 없지만 평화로운 길가에서 마음을 놓을 수 있다는 게 다행이라면 다행. 풀라스키 스카이웨이의 악몽.
출발시간이 늦다보니 모리스 타운(morris town)까지 15.5 마일 밖에 안 되는데도 벌써 7시. 조그마한 타운에 음식점이 널려 있다. 동양식 밥이 땡겨 들어간 현대 중국 음식점이라는 'aikou' 레스토랑. 주인은 물론 종업원도 태반이 동양인이다. 같은 아시아 계열인 내 눈에는 중국인이 대부분.
식사를 마친 내게 꿈 같은 장소가 보인다. 스타벅스(Starbugs). 한국에서는 거의 가지 않지만 미국에서 이만큼 반가운 데도 없다. 바로 무료 와이파이가 가능하기 때문. 게다가 아침 8시부터 밤 12시까지 문을 연다는 친절함까지. 특별히 오늘 밤에는 두 명의 친절한 미국인까지 내게 다가 왔다. 매장 종업원인 에드윈 메나(Edwin Mena). 히스패닉계열로 생겼는데 역시나 에콰도르에서 부모님과 함께 이민 온 사연을 가지고 있다. 짧은 교대 시간 동안 저녁식사를 간단히 해치우는 그와 대화를 나누던 중 한 아주머니와 눈이 마주쳤다.
"저 자전거 너꺼니?""아, 세워두면 안 되는 건가요?""아니, 그게 아니고."켄드라(Kendra)는 이 동네 자전거 동호회 회원이다. 이번달 동호회 활동 계획표까지 보여주며 자신을 소개한다. 자전거 라이더 알아보는 건 라이더 밖에 없다. 텐트 칠 만한 장소를 물색 중이라고 하자 회원 중에 뒷마당을 빌려줄 사람을 바로 찾아보겠다는 반가운 대답.
NIMBY(not in my back yard)가 아니라 PIMFY(please in my front yard)다. 지역 기피 시설이 유치 희망시설로 바뀌는 순간. 소개를 받고 찾아간 더글러스는 전형적인 중산층 백인이었다. 호젓한 2층집에 앞 뒤로 마당이 널찍하다. 뒷마당에는 큼지막한 창고도 있어 웬만한 공구들은 가득 차 있다. 언젠가 뉴저지에서 플로리다까지 가 볼 계획이라는 그는 많은 얘기를 나누고 싶어 했다. 하지만 아침 일찍 자전거를 타고 출근하려면 일찍 일어나야 된다며 끝내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다.
멀고 먼 한국에서 온 자전거 라이더가 여기에 들른 일은 그에게 특별하다. 오늘 오후 '모리스 타운 앨리캣(moriss town alleycat)'이라고 해서 타운 중심부 그린 파운틴(green fountain)에서 회원들이 모여 자전거도 타고 게임도 하며 즐거운 시간을 가졌던 것이다. 불과 몇시간 전의 이벤트를 마치자 나타난 한국인 청년에게 그는 'synchronical'(공시적인)이란 단어를 연신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