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수 김경호. 이 머리를 하면 '오빠'가 될 줄 알았다. 하지만...
연합뉴스
살을 빼지 않고 머리를 기른 이유는 그때만 해도 삐져나오는 뱃살을 추스르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키와 몸무게는 지금과 별 차이가 없었지만, 나름 운동으로 단련된 균형 잡힌 몸인지라, 호흡 조절만 잘하면 뱃살을 감쪽같이 감출 수 있었다.
'운동', '단련' 이런 말할 때마다 "운동으로 단련된 몸인데 어째서 몸무게가 그 모양이냐"는 질문을 자주 받는다. 사실 나도 그 이유를 모르겠다. 내가 생각해도 내 몸은 정말 연구 대상이다. 운동도 좋아하고 그리 많이 먹는 편도 아닌데 어째서 몸무게는 항상 80kg을 웃도는지를(그리 많이 먹지 않는다는 것은 사실 내 주장일 뿐이다. 이 주장에 아내는 절대 동의하지 않는다).
머리를 기르기 위해서 굉장한 각오가 필요했다. 대한민국 사회에서 평범한 직업을 가지고 있는 30대 남자가 머리를 기른다는 것은, 그 나이 또래 여성이 스포츠형 머리를 하는 것만큼 어려운 일이었다.
머리카락이 어깨 근처까지 내려왔을 때 가장 많이 듣던 말은 "요즘 무슨 일 있어?"였다. 나와 어느 정도 친분이 있는 사람들이 주로 하던 말이다. 하던 일 때려치우고 혹시 집에서 노는 것 아니냐는 말이다.
그 다음에 자주 듣던 말은 "혹시 결혼은 하셨어요?"라는 말이다. 처음 만난 사람들이 주로 묻던 말이다. 젊어 보여서 그러는 게 아니다. 결혼을 하고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한다면 절대로 할 수 없는 헤어스타일을 하고 있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언니' 한마디에 아내의 비웃음... 곤두박질친 '오빠의 꿈'그래도 밖에서 듣던 말은 얌전한 편이었다. 집안에서는 훨씬 더 심한 말을 들어야 했다.
"자네 같은 머리 하고 다니는 사람을 옛날에는 모두 반란군이라고 불렀네, 반란군 알지? 아, 빨치산 말일세."장모님이 명절날 한 말이다.
"얘, 아배야, 너 그렇게 힘드니? 머리 깎을 돈도 없어? 내일 읍내 가자. 내가 돈 내줄게."이 말은 고향집에 내려갔을 때 어머니가 한 말이다.
"얘, 너처럼 머리 크고 목 짧은 사람은 단정한 게 나아…."나보다 아홉 살 많은 친누나가 한 말이다.
사실 가족들에게 이보다 더 모진 말도 들었지만 난 꿋꿋하게 버텼다. 조금만 더 길러서 머리카락이 어깨를 덮으면 덥수룩한 머리가 가수 김경호처럼 찰랑거리는 머리로 바뀔 줄 알았다. 그러던 어느 날 생면부지의 여인에게 충격적인 한마디를 듣게 된다.
"언니…, 언니…."이게 설마 나를 부르는 소리인 줄은 꿈에도 몰랐다. 당연히 뒤를 돌아볼 이유도 없었다. 누군가 등을 쿡 찌르는 느낌이 들어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화장을 진하게 한 40대 여인이 서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아는 얼굴이 아니었다.
그 여인은 못 볼 것을 본 것처럼 화들짝 놀라며 "아~ 죄송해요, 제가 잘못 봤네요" 하고는 황급히 고개를 숙여 미안함을 표시했다. 그제서야 이 여인이 그토록 애타게(?) 부른 '언니' 가 바로 나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여인은 내 뒷모습을 보고 나를 '오빠'도, '아저씨'도 아닌 뚱뚱한 '언니(아줌마)'로 착각한 것이다. 퇴근하고 아내가 운영하는 꽃집에 들렀다가 당한 일이었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아내가 키득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아내의 웃음이 한여름 뙤약볕처럼 따갑게 느껴졌다.
아내의 웃음을 피해 난 곧장 미용실로 달려갔다. 미용실 '언니(아줌마)'에게 "스포츠로 잘라주세요, 아주 짧게요"라고 말했다. 미용실 언니는 두말 없이 내 머리카락을 이발기로 밀었다. 바닥에 떨어지는 내 긴 머리카락과 함께 '오빠의 꿈'도 곤두박질치고 말았다.
이번에는 살과의 전쟁... 운동했더니 밥맛만 좋아지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