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화 선생의 모습한글학회 홈페이지 소장
이중화
그러나 6·25전쟁 도중인 1950년 7월 24일 서울 종로에서 인민군에 납치되어 납북된 뒤, 이후 그의 업적은 매몰되었다.(인터넷 "한국전쟁납북사건자료원" 납북자 명단에 나옴.)
납북될 당시의 나이가 70세였다. 그의 후손들도 빈곤에 허덕이고,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하였다. 그런 관계로 지금까지 선열을 제대로 예우할 수 없었다.
필자는 최근에 조선어학회의 항일 선열을 정리하는 도중 항일투쟁을 활발히 하였음에도 독립유공자가 되지 못한 이중화 선생을 발견하였다.
이중화는 1881년 한성시 징청방 두석동(현재 종로1가)에서 출생하였다. 어린 시절에 10년간 한문을 배웠다. 1899년 9월 민영환이 설립한 흥화학교에 입학한 뒤에 영어와 지리와 역사 과목을 수학하였다. 특히 남궁억 교사에게 영어를 배웠다. 1903년 6월 흥화학교를 졸업한 뒤, 이 학교에서 영어를 강의하였다. 1910년 일제에 의해 흥화학교가 폐교되자, 그 해 11월 배재학당에 조선어와 역사지리 교사로 부임하였다.(<배재학보>제일호, 1918, 33쪽) 주시경과 함께 교원으로 활동하였다.
배재학교에서 3·1운동 때 독립선포문을 작성하여 배포한 혐의로 그는 교사 강매, 김진호, 김성호와 학생대표 김병호 등 18명과 함께 일제에 체포되어 투옥되었다. 아울러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 출신 이일선과 독립선언문을 영문으로 번역·인쇄하여 외국인의 집에 배포하기도 하였다.(<배재80년사>, 1965, 448쪽.) 이후 1935년까지 배재학교에서 근속한 뒤, 같은 해 경성 여자 미술학교에 교장으로 부임하였다.
그는 1910년 일제 강점시기부터 그들의 강압통치에 불만을 품고 조선의 독립을 희망하였다. 조선어학회에 회원으로 가입한 뒤, 1936년 4월부터 1942년 10월까지 조선어학회가 추진하던 조선어사전편찬의 전임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36년 8월에는 조선어 표준말 사정위원회의 제3회 독회에 참여하였고, 표준어 제정의 수정 위원으로 활동하였다. 아울러 조선어학회가 추진하던 '외래어 표기법 통일안'에도 참여하였다.
일제가 일으킨 조선어학회 사건에 그도 연루되었다. 1942년 10월 1일 서울에서 체포되어 함남 홍원경찰서와 함흥감옥에 수감되었다. 그 때 나이가 62세였다. 일제는 환갑이 넘은 연로한 인사도 구속하여 구타하고 고문을 자행하였다. 아들 이순호와 며느리 지명식(현재 92세)씨가 함흥감옥에 면회를 갔을 때, 그는 감옥 생활의 고통을 얘기하지 않고 꼿꼿하게 앉아 있었다. 이는 지명식씨가 자식인 이봉수(이중화의 직계손자, 현재 56세)에게 전한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