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내몽골자치구 후어하오터시의 칭기즈칸 대로. 표지판에서 좌우로 펼쳐진 도로가 칭기즈칸 대로.
김종성
서기 10세기를 기점으로 0~3시의 전략적 위상이 강해짐에 따라 이 지역에 있는 한반도의 위상도 바뀌게 되었다. 926년 발해의 멸망과 함께 한민족의 강역은 한반도로 축소되었다. 하지만, 0~3시 방향의 강화와 더불어 한반도의 전략적 위상이 제고되었기 때문에, 한민족은 여전히 무시할 수 없는 민족으로 남을 수 있었다.
한반도에 부여된 전략적 위상이란, 한반도가 0~3시 방향과 중국의 대결을 완충하는 지점이 되었다는 점이다. 이로 인해, 0~3시 방향이 한반도를 사전에 제압하지 않고서는 중국 정복을 완성할 수 없게 되는 구도가 나타났다. 한반도가 배후에서 기습을 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한반도를 제압한 다음에야 중국 정복에 총력을 기울일 수 있게 된 것이다.
거란족 요나라나 여진족 금나라가 북중국만 장악하고 더 이상 남진하지 못한 것은 고려를 제대로 굴복시키지 못했기 때문이다. 반면, 몽골과 청나라가 북중국뿐만 아니라 남중국까지 정복한 것은 사전에 한반도(고려·조선)를 굴복시켰기 때문이다.
한반도를 확실한 자기편으로 만들어놓은 나라만이 중국 전역을 마음 놓고 공략할 수 있었던 것이다. 몽골이 뒤늦게나마 중국 전역을 차지할 수 있었던 것은, 뒤늦게나마 고려를 자기편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쿠빌라이칸과 연합해 무신정권과 대결한 원종칭기즈칸 사망 4년 뒤인 1231년부터 몽골은 고려 침공을 단행했다. MBC 드라마 <무신>의 최근 방영분에서는 고려-몽골 전쟁(여몽전쟁)의 초기 상황을 보여주고 있다. 양국의 전쟁은 이런 상태로 무려 40년간이나 계속되었다.
만약 고려와의 전쟁이 신속히 종결됐다면, 몽골은 중국 전체를 훨씬 더 빨리 정복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랬다면, 서유럽으로도 진격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생겼을지 모른다. 하지만, 다섯 번째 카칸이 즉위한 후에도 중국 정복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고려와의 전쟁이 예상 외로 장기화되면서 몽골의 군사력이 여기저기로 분산되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고려를 무시한 채 중국과 총력전을 벌일 수는 없었다. 고려와 중국이 협공을 가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