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권씨 효부각
정만진
안동권씨 효부각
효부(孝婦) 권목월(權木月)은 1887년 안동인(安東人) 권대섭의 딸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성품과 행신이 단정하여 널리 칭찬을 받았다.남원인(南原人) 양종기(梁宗基)와 혼인한 후에는 시어른을 극진히 모시고 가업을 잘 보살폈다. 시어머니가 중풍으로 거동이 어려워지자 늘 거처를 깨끗하게 돌보고 수저질도 해드려 널리 소문이 났다. 집이 어려웠으므로 낙동강의 어부들이 버리는 치어(穉魚)를 주워와 장만하여 시어머니께 반찬으로 드렸고, 말려서 오랫동안 먹을거리로 썼는가 하면, 철따라 야생 채소류들을 거두어 시어머니의 입맛을 돋우는 데 힘썼다. 이에 남편 양씨도 남의 집 품팔이를 다니면서 값진 담배를 얻어와 어머니께 드렸다.셋째며느리인 그녀가 시어머니가 87세에 돌아가실 때 남달리 극진히 효성을 다한 소문은 의성군수에게 전해져 표창이 내려졌고, 유도회 비안지부에서 비각 건립을 주도하였다. 길가에 정려각이 있는 것을 보고도 그냥 지나치는 답사자들이 많다. 그래서는 진정한 역사여행, 문화유산 답사자가 못 된다. 또는, 정려각 앞에 잠깐 서기는 하지만 안내판을 건성으로 읽기도 한다. 그 또한 옳지 않다. 우리가 무심코 정려각들을 보지만, 내용에 등장하는 실제 인물들은 사실 얼마나 힘들게 살았는가. 어렵고 안타깝게 살다가 떠나간 그 분들을 떠올리면서, 내가 반성할 것과 본받아 실천할 일은 무엇인지 깊이 생각해 보는 것, 그것이 정려각 앞에서 답사자가 할 일이다.
(그래서 나는 지금 정려각의 안내문들을 모두 옮겨서 적어본다. 진정성을 가지고 글을 모두 읽었다는 증거를 나 자신에게 남기려는 것이다. 또 독자들에게 답사의 내용을 온전히 전달해내는 장점도 발휘할 수 있다.)
다행히 이 정려각은 답사자의 마음에 조금의 위안을 준다. 그녀의 이름이 세 글자 모두 생생하게 살아 있기 때문이다. 옛날의 여성들은 웬만해서는 성씨만 남고 뒤의 이름은 없는데, 안동권씨 이 분은 권목월 세 글자를 모두 남기고 있다. 그녀의 이름 석자가 역사에 남을 수 있도록 노력한 사람들이 누구인지는 알 수 없으나, 권목월 님의 명복을 빌면서, 그 분들에게도 고마운 마음을 전달하고 싶다.
조금 더 나아가니 이번에는 길 왼쪽 산비탈에 정려각이 또 있다. 작은 논이 하나 있고, 그 너머 산비탈에 있기 때문에 길가에서는 안내판을 읽을 수 없다. 한창 자란 벼들을 바라보며 왼쪽으로 돌아 정려각까지 가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