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개 직책을 동시에 맡은 나... 아이들을 만날 시간이 사라졌다. 영화 <완득이> 중 한 장면.
유비유필름
상황이 이렇다 보니 '아이들의 존경을 받는 교사는 절대 승진할 수 없다'는 말이 학교마다 돌고 있다. 이런 말들은 수업에 대한 교사의 열정을 희화화하는 등 교사들로 하여금 교육의 본령에 대한 회의를 불러일으킨다. 뿐만 아니라 이런 말들이 자칫 아이들 귀에라도 들어간다면 아이들에게 그릇된 가치관을 심어주게 될 것이다. 폐해는 상상 이상이다.
내가 아직 철이 아직 덜 들어서일까. 나는 '잡무'라는 게 얼마나 교사를 병들게 하고 교육 자체를 황폐화시키는지를 최근에서야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 올해 학생부장으로 일하면서 얻게 된 뒤늦은 깨달음이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학교에서 행정 업무를 담당하는, 이른바 보직 교사들이 토로하는 공통된 하소연이 바로 잡무로 인한 과도한 스트레스다.
고백하건대, 그동안 배운 건 잡무의 처리 속도와 융통성(?)이고, 잃은 건 아이들과의 교감과 신뢰였다. 일에 치이다 보니 솔직히 수업을 준비할 여유는커녕 수업 들어갈 시간조차 없다. 다른 학교 학생부장과의 통화에서 "힘들어 죽을 지경"이라고 했더니, 그 선생은 "나는 죽을 시간도 없다"고 혀를 내둘렀다. 수업에 소홀해지다 보니, 아이들 앞에 당당하게 설 수 없는 건 당연하다.
올해 학교에서 맡게 된 '일'들을 수첩에 낙서하듯 적어봤다. 투표를 통해 선출된 직무도 있고 순번에 걸려 떠맡게 된 일도 있지만, 대개는 학생부장이기에 당연직처럼 담당해야 하는 것들이다. 급여라고 해봐야 매월 보직 교사 수당 8만 원이 전부지만, 책임질 일은 엄청나게 많다.
'학생부장, 학교폭력대책자치위원회(폭대위) 간사, 학생선도위원회 간사, 학교폭력전담기구 간사, 학교폭력 담당교사, 학생인권교육 담당교사, 위기학생관리위원, 학교운영위원회 교사위원, 학교분쟁조정위원, 교원인사위원, 교육기자재선정위원, 학업성적관리위원, 교과(사회과)부장...'무려 13가지다. 정작 '교사'라는 본연의 업무가 끼어들 틈조차 보이지 않는다.
면책용 서류에 목매는 교사들주지하다시피 폭대위는 학교폭력 발생 시 소집해야 하는 외부인으로 구성된 법적 심의 의결 기구고, 학생선도위와 학교폭력전담기구는 경미한 학교폭력 사건을 비롯해 학교에서 발생한 온갖 소소한 일들을 처리하는 상설 기구다. 또, 위기학생관리위는 자살 충동이나 우울 등 정신적 고통에 시달리는 학생들을 상시 관리, 상담하는 역할을 맡는다.
그런가 하면 학교운영위와 학교분쟁조정위, 교원인사위 등은 학사일정과 교원 인사 등 학교운영 전반에 걸친 일들을 심의 의결하는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잡무를 줄인다는 차원에서 학교 내 위원회 수를 줄이려는 움직임이 있었지만, 학교폭력이 사회적으로 이슈화하면서 되레 다소 늘었다. 그런데, 성격상 대부분이 학생부와 연관된다.
교내에 위원회가 한둘이 아니다 보니 솔직히 회의록 작성하고 보고하는 일만 해도 적지 않은 시간과 노력이 든다. 당연히 업무량은 늘어난다. 그리고 늘어난 업무량만큼 업무의 내용은 부실해진다. 필요하다는 장부라서 빠뜨리지 않고 기록을 남기고 갖춰놓긴 하지만, 그것이 아이들 교육에 진정 도움이 될 것이라는 기대는 애당초 하지 않게 된다.
그런데도 교사들이 '서류 작업'에 목매단 까닭은 따로 있다. 행여나 사고가 터졌을 때 학교와 자신들에게 화가 직접적으로 미치지 않도록 하는 가장 중요한 '면책용' 수단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많은 교사들이 잡무에 시달리느라 아이들과 제대로 상담할 시간조차 없으면서도 '상담일지'만큼은 그럴듯하게 만들어 갖추고 있는 건 그 이유 때문이다.
학교폭력, 교사가 아이들과 함께 해야 해결 가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