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자들 풍경좀 더 남을 배려하는 모습이면 좋을걸..
양학용
이러한 나의 간절한 바람과는 달리 놈들은 겨우 한 시간 정도를 자는 것 같더니 한두 명씩 일어나서는 곧바로 다시 맥주를 마시고 담배를 펴대기 시작했다. 그들은 늘어난 숫자만큼 담배연기의 양도 '빠꼼빠꼼' 곱절로 생산해대며 아내와 나를 비롯한 선량한 승객들을 괴롭히기 시작했다.
세상일이란 것이 참는 것도 한도가 있는 법이다. 전통 영국신사까지는 아니더라도 세계화시대의 기본은 가야할 것 아닌가. 마침내 나는, 결심했다.
'그래 놈들 패거리에게 맞아 죽는 한이 있더라도 할 말은 하는 거야. 지금이 어떤 시대인데, 이 따위 말도 안 되는 비상식적인 행동을 한단 말인가!'그렇게 마음을 다잡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고 생각하는 순간, 평소에는 별로 무겁지도 않던 내 엉덩이가 그날따라 근엄한 중력의 무게로 주인의 명령을 거부하는 대신, 내 앞자리에 앉아있던 덩치가 크고 얼굴에 구레나룻이 시커먼 미국에서 온 중년남자가 벌떡 일어나서 걸어 나가더니 친절하면서도 매우 단호한 목소리로 놈들에게 한 마디를 했다.
"익스큐즈 미. 거, 당신들만 타고 가는 배도 아닌데, 음악 볼륨 좀 낮추면 좋겠는데요."그랬더니, 놈들 중에서 체크모양의 영국신사 모자를 삐딱하게 쓰고 눈썹이 숯검정을 바른 것처럼 짙고 그 왼쪽 눈썹 끝에 피어싱을 멋지게 한 녀석이 입을 비틀어 비아냥거리듯이 대답했다.
"네? 뭐라고요? 방금, 뭐라고 하셨나요? 아~, 음악? 좋아요!" 하지만 대답과는 반대로 음악 볼륨을 더 높여버린다. 용감했던 우리의 미국 아저씨 한 말을 잃고 돌아서고, 나는 덩달아 한숨을 쉰다. 자칫 잘못하다간 봉변을 당할 분위기다. 저런 인간들은 아예 여행을 못하게 하는 법을 만들 수는 없겠지? 오늘 하루 받아야할 벌이 한없이 무겁게 느껴진다.
그래도 강은 흐르고 태양이 멈추지 않듯이 고맙게도 시간도 멈추지 않았고 배도 목적지를 향해 꾸준히 나아갔다. 그렇게 뽀얀 담배연기와 함께 하루의 해가 저물어갈 즈음 우리들 낙오자 그룹은 루앙프라방에 도착했다. 먼저 출발했던 아이들이 선착장 어귀에 배낭을 부려놓고 패잔병들처럼 앉아 있다가, 늦게 도착한 우리 네 명을 발견하고는 우르르 달려들었다.
"이모! 삼촌! 왜 이제 와요!""성호 오빠! 승현아!"아이들의 목소리에 간절함이 묻어있다. 한국에서 누군가 TV 리모컨을 작동하다 이 장면을 우연히 보았다면 무슨 이산가족 상봉 프로그램으로 착각할 지도 모르겠다. 고작 하루의 뱃길을 서로 다른 배를 타고 조금 다른 시간대에 존재했었다고 이렇게까지 애틋해질 수도 있을까.
그건 아마도 금방 따라올 것 같은 배가 한 시간도 더 늦게 도착했으니, 그동안 아이들 마음속에서는 혹시 만나기로 한 장소를 잘못 알고 있거나 길이 어긋난 것은 아닐까 하는 걱정들이 스멀스멀 피어났던 모양이다. 더군다나 대학생과 고등학생 언니오빠들은 시키지도 않았는데 어느새 숙소를 물색하러 가고 없었다. 그래서 꼬마들만 남아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