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유동 고시원방필자가 살던 고시원방의 모습. 이곳은 동굴이었다.
김영경
그럼에도 나이가 들어가고, 그만큼 몸과 마음이 아픈 횟수가 잦아지고, 그리하여 많이 외롭고 서글퍼지는 나날을 보내다 보면, 가족을 향한 마음이 절실해진다. 그렇다고 꼭 피를 나눈 '혈연'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생활의 공간에서 서로의 아픔을 나눌 인간관계에 대한 갈망이다.
1년여의 고시원 생활을 거치면서 '가족의 부재'가 한 인간을 어떻게 처절한 절망으로 이끄는지 깨달았다. 오로지 종이와 매직으로 '상명하달'하는 고시원 총무와는 그 어떤 인간적 교감도 나눌 수 없었다.
어쩌다가 쉬는 날에 온종일 누워 있어도 '밥 먹으라'며 부르는 사람이 없고, 낮인지 밤인지 구분이 되지 않아 주말 내내 잠만 자다 월요일 아침을 맞이하는 동굴 같은 삶. 그 속에서 여실히 깨달은 것은 내게도 인간적인 교감을 나눌 사람이, 그러니까 '가족'이, 생활의 공간에서 필요하다는 사실이었다.
메모지에 적은 한 줄... 마음을 열었네1년간의 동굴, 아니 고시원 삶을 청산하고, 지금 내가 사는 집은 3개의 방을 한 칸씩 빌리고, 주방·욕실·거실을 함께 공유하는 공동 주거 형태의 임대주택이다. 하나의 주거공간을 3명의 가구주가 함께 쓰는 셈이다.
내가 사는 곳은 한 여성단체에서 운영하는 임대주택. 지하 1층 지상 3층 규모에 약 20명 가량이 이곳에서 살고 있다. 이 임대주택에 사는 사람들의 연령대는 10대부터 50대까지 다양하다. 여성만 사는 임대주택이다 보니 남성은 아예 출입이 불가능하다. 간혹 이삿짐을 나르러 들르는 것 외에는 아예 얼씬거리지 못한다는 이야기다. 이 임대주택의 설립 목적은 '여성의 자립'. 때문에 입주자들은 2개월 이상 '백수'로 지내면 안 된다는 규정도 있다.
이곳에는 지인의 도움으로 우연히 들어오게 됐다. 최저임금에 준하는 월급을 벌고, 고시원 생활을 1년여 했기 때문에 누릴 수 있는 나름의 혜택(?)이었다. 나이 서른이 넘어 혼자만의 공간을 갖고 싶어 찾아간 고시원에서 인간적 교감을 절실히 느끼다 보니, 모르는 사람들과 같은 공간을 나눠 쓰는 불편함을 다시 선택하게 된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처음부터 이 생활이 좋지만은 않았다. 공동 공간은 방치돼 사람 사는 집 같지 않았고, 한집에 사는 이들 모두 각자의 방에 들어가 굳게 닫은 문을 잘 열지 않았다.
이사를 온 지 며칠 되지 않은 때였다. 공동으로 사용하는 화장실의 욕실화가 너무 지저분해서 분홍색 새 슬리퍼를 사다 놨다. 그런데 그 욕실화에 자꾸 선명한 발자국이 생기는 것이었다. 씻어 놓으면 생기고, 씻어 놓으면 생기고.... 사소한 일이라지만, 주거 공간에서 사사건건 부딪히는 상황이 결코 달가울 리 없었다.
각자 출퇴근 시간도 다르기 때문에 이야기조차 나누기 어려운 상황이라 처음에는 화장실 문에 메모지를 붙여 대화를 시도했다. 예전처럼 아는 후배나 동생과 함께 살았다면 단번에 해결될 문제였겠지만.... 낯선 이들과의 관계에서 생기는 문제는 얼굴을 마주하고 나누는 대화와 문짝에 붙여놓은 메모지의 간극만큼 어려운 것이었다.
다행히 메모지로 시도한 대화가 실내화 문제를 해결했고, 서로의 마음에는 약간의 '해빙 모드'가 형성됐다. 어떻게 문을 두드리고 각자의 방에서 나오면 되는지 조금은 알게 됐다고 할까.
같은 공간을 쓰는 낯선 가구주들과의 인간관계를 만들어 준 장치는 다름 아닌 '반상회'였다. 한 달에 한 번, 다른 층에도 있는 모든 사람들이 모여 반상회를 개최한다. 반상회에 참여하는 인원 수는 10명이 조금 넘는다. 낯선 이들이 서로의 근황을 나누고, 공동으로 해결할 문제를 의논하는 자리다. 이 과정에서 자연스레 많은 대화가 오가는데, 이를 통해 같은 공간에서 인간적인 교감을 나눌 수 있는 관계로 발전하게 된다.
이제는 한 달에 한 번 열리는 반상회를 우리집 차원에서도 진행을 하고 있다. 생활비를 어떻게 걷고, 집에 필요한 생필품이 뭔지, 공동구역 청소는 어떻게 구역을 나누고 누가 맡을지 깨알 같이 나누고 토론한다. 이런 과정을 통해 가끔이라도 밥을 함께 먹는 식구(食口), 그러니까 '가족'이 됐다. 이웃의 얼굴조차 모르는 이 삭막한 도시에서 느낄 수 있는 색다른 푸근함이다.
"라면 좀 그만 먹어요" 한 마디에 가슴이 울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