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1일 오후 경기도 평택역 앞에서 '살인정권 규탄! 정리해고 철폐! 제 4차 쌍용차 포위의 날' 참가자들이 가두 행진을 하고 있다.
김도균
누구든지 추락할 수 있는 것이 바로 강정의 현재다. 문 신부는 퇴원 당일, 병실로 찾아온 해양경찰 관계자에게 "내가 떨어지길 천만 다행이야, 경찰이 추락했으면 어찌할 뻔했어?"라고 반문했다고 한다. 문제의 근본을 볼 것을 다시 한 번 지적했던 것이다. 종교인다운 언행이라고 할지 모른다. 그러나 문제의 근본, 타자를 양산하는 구조를 알아차릴 때, 서로 다른 위치에 서 있지만, 실은 모두가 타자이며 동시에 모두가 주체임을 일깨우는, 실로 오랜 세월을 고통의 현장에 섰던 노사제의 가르침이 아닐 수 없다.
지난해 미국 월가를 달궜던 시위대의 표어는 '점령하라'였다. 이 시위는 단지 2008년 서브프라임 모기지에 대한 월가 금융인들의 도덕적 해이만을 겨냥한 것이 아니었다. 양극화를 넘어 1% 대 99%라는 부의 집중을 양산한 '구조'에 대한 분노를 드러낸 것이라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그들은 '높은 생활수준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지금 보다 좀 더 나은 생활을 바라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한국사회에서도 잘 알려진 사상가 슬라보예 지젝은 이 시위의 연설에서 "지치고 피로한 노동자들과 사랑에 빠지라"면서도, "월 스트리트 사람들과 그들의 태도를 비난하지 말자. 기억하라. 문제는 부패나 탐욕이 아니라 사람들을 부패하게 하는 시스템이다"라고 일갈했다. 문제는 "왜 그들과 내가 그 곳에 있어야 했는지"라던 문신부의 이야기와 철저히 닮아 있다.
바꿔 말하면, 누구든지 '추락할 수 있는 그 곳'에 서 있는 처지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누구든지 해고 노동자가 될 수 있고, 강정마을의 고통이 될 수 있고, 누구든지 타자가 될 수 있다.
왜 거리에서 촛불을 밝혔는지 묻기를거리의 걸인을 그냥 지나쳐야 하는 '합리적 의심'이 옳은 시대가 됐다. 그러나 또한, 동시대의 강정과 월가를 통해 현대의 합리적 개인들의 의심은 시스템(구조)으로 옮겨가고 있다. 지젝의 연설은 이어진다.
"주의할 점이 있습니다. 스스로와 사랑에 빠지지 마세요. 우리는 여기서 멋진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문제는 그 다음날입니다. 우리가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야 할 때지요. 저는 여러분이 지금의 나날을 '아, 우리는 젊었고 그때는 좋았지' 이렇게 기억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기본 메시지가 '대안을 생각할 수 있다'는 것임을 기억합시다." 월가의 시위 이전, 한국은 이미 수많은 '촛불'을 경험했다. 그야말로 '작고 약한 개인'들의 반란이었다. 그러나 삶과 사회는 나아지지 않았다. 이제는 각자가 자신에게 물어볼 차례다. 왜 거리에서 촛불을 밝혔는지. 여전히 거리의 걸인을 의심하며 지나치는지. 혹시 점령해야 할 것은 작고 약하기만한 변명이나 합리성을 가장한 의심 따위는 아닌지 말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를 쓴 고유기씨는 현재 민주통합당 제주도당 정책실장으로 활동중입니다. 이 기사는 인권연대 주간 웹진 <사람소리>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본인이 작성한 글에 한 해 중복게재를 허용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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