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향 기원 위령비'를 세우는 문제로 논란이 되었던 경남 사천 출신의 가미카제 특공대원 탁경현(1920∼1945)
서해문집
정상적인 군대에서 '자살특공대' 따위를 편성하거나 그런 작전을 감행하는 건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작전을 하다 전사할 수는 있지만, 애당초 죽음을 전제하고 짜는 작전이란 있을 수 없는 일이 아닌가. 그러니 그런 말도 안 되는 작전이 기획·수행되었다는 것은 그 시기가 그런 것을 용인할 수 있는 체제였고 그 시기적 급박성이 높았다는 뜻일 터이다.
가마카제 특공대는 태평양전쟁 말기인 1944년 10월, 필리핀 방어를 위한 레이테 해전에서 처음으로 기획, 집행되었다. 절대 열세인 항공 전력으로 미군과 맞서야 했던 일본군은 해군의 항공모함 탑재기 '제로센'에 250kg의 폭탄을 실은 뒤 적 항공모함의 갑판에 몸체공격을 감행하는 계획을 세웠던 것이다.
이 특공대의 정식명칭은 '신푸(神風)특별공격대'였다. 그러나 당시 아나운서가 '신푸'라 음독하는 대신 '가미카제'라고 훈독한 이후에는 '가미카제'라는 이름으로 굳어졌다. 다섯 대의 비행기로 감행된 첫 출격은 믿기 어려울 만큼의 전과를 올렸다. 그러나 이는 불행하게도 자살특공대를 전세 역전을 위한 '필승의 전술'로 받아들이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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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쓰이 히데오! 그대는 우리의 오장(伍長) 우리의 자랑. 그대는 조선 경기도 개성 사람 인씨(印氏)의 둘째 아들 스물한 살 먹은 사내
[중략] 우리의 동포들이 밤과 낮으로 정성껏 만들어 보낸 비행기 한 채에 그대, 몸을 실어 날았다간 내리는 곳 소리 있이 벌이는 고흔 꽃처럼 오히려 기쁜 몸짓 하며 내리는 곳 쪼각쪼각 부서지는 산더미 같은 미국 군함! 수백 척의 비행기와 대포와 폭발탄과 머리털이 샛노란 벌레 같은 병정을 싣고 우리의 땅과 목숨을 뺏으러 온 원수 영미의 항공모함을 그대 몸뚱이로 내려쳐서 깨었는가? 깨뜨리며 깨뜨리며 자네도 깨졌는가 장하도다
우리의 육군항공 오장 마쓰이 히데오여 너로 하여 향기로운 삼천리의 산천이여 한결 더 짙푸르런 우리의 하늘이여
- 서정주 <마쓰이 오장 송가>(매일신보 1944. 12. 9)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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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조선인 가미카제 특공대원은 모두 17명이다. 서정주의 친일시 <마쓰이 오장 송가>의 주인공인 인재웅이 첫 희생자였고 1944년 6월 오키나와 주변 해역에서 사망한 한정실이 마지막 전사자였다.
마지막 희생자는 본명 불상의 야마모토 타츠오(山本辰雄). 그는 특공기 방화범으로 몰려 해방 일주일 전인 1945년 8월 8일 총살되었다. 그가 방화범으로 몰린 이유는 단 하나, 그가 조선인이었기 때문이었다.
야마모토 타츠오뿐 아니라, 이들 특공대원들의 죽음은 일본을 위한 전쟁에 자원 참전, 목숨을 바친 조선인 청년들의 죽음을 규정하는 것은 쉽지 않다는 걸 역설적으로 시사해 준다. 이들의 '원수의 나라'를 위해 군인이 되었지만 죽는 순간까지 차별을 받았다. 그들은 죽음을 선택했지만 그 죽음이 일제가 원했듯 '천황을 위한' 것으로 여기지는 않았던 것 같다.
일본군이 비행기 조종사를 충원하는 통로는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비롯하여 육군특별조종견습사관(특조), 육군소년비행병(소비) 등 셋이었다. 육사를 졸업한 조선인 특공대원은 최정근(56기)뿐이고 나머지는 특조 출신의 장교나 소비 출신의 하사관들이었다.
열일곱 명의 조선인 가미카제들특공대원 가운데 첫 전사자인 인재웅(창씨명 마쓰이 히데오 松井秀雄)은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 일본인 소학교를 다니며 전형적인 황민화 교육을 받았다. 그는 최초의 비행사 안창남 때문에 일기 시작한 항공열에 들떠 지내다가 소년비행병이 되었다.
그는 1944년 11월 29일 여섯 명의 대원과 함께 출격해 레이테 만에 정박 중이던 미군의 수송선단에 몸체 공격을 감행해 숨졌다. 그의 공격으로 연합군의 함선이 어떤 피해를 입었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소심하고 정 많던 소년 인재웅은 스무 살의 생애를 마감하는 대신 일제에 의해 '반도의 영웅'으로 기려졌다.
경흥의 수재였던 최정근이 일본 육사를 나와 가미카제 특공대원이 되었듯 특공대원이 되었던 젊은이들은 대부분 식민지 조선의 유능한 젊은이들이었다. 이들은 '조선인'이라는 신분적 한계를 뛰어넘기 위해 일본군 비행사가 되는 길을 선택했다. 그러나 그런 선택도 궁극적으로 차별로 그들을 자유롭게 만들어 주지 못했다.
이들은 육사와 특조, 소비를 통해 비행사가 되었지만 신분적 차별을 벗어나지는 못했으며 그예 일본 군국주의의 희생양이 되어 역사의 저편으로 사라졌다. 비행기 조종사는 그들의 선택이었지만 '자살특공대'는 그들의 자발적 선택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