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메리칸 아이돌' 한희준(23)씨가 지난 4일 미국 전역에 생방송되는 공중파 토크쇼 웬디 윌리엄스 쇼에 출연해서 선물 받았던 '누들' 바구니.
최경준
또한 각종 시트콤이나 영화 출연 제의도 쇄도하고 있다. 시즌이 종료된 뒤 오디션 참가자들에 대한 최종 평가가 이뤄지고 나서야 이런 제안들이 들어오는 과거의 전례에 비춰보면 다소 이례적인 일이다. 아직 시즌이 진행되고 있는데도 먼저 탈락한 한씨에게 관심이 집중되는 아이러니한 현상이 벌어진 것이다.
앞서 이 오디션에 참가한 한인 중에는 가수 존박(시즌 9, '톱 20')씨와 폴김(시즌 6, '톱 24')씨가 있다. 그러나 두 사람과 달리 한희준씨는 '탑 9'을 기록했기 때문에 자신의 노래에 대한 음원료와 방송 출연료 등을 챙길 수 있고, 최고급 아이돌 저택에 머물렀으며, 다른 결승 진출자들과 함께 오는 6월부터 미 전역 50여 개 도시를 돌며 투어 콘서트를 할 수 있게 됐다.
지난 11일 뉴욕 퀸즈 플러싱에 있는 집으로 돌아와 가족들과 함께 오랜만에 휴식을 취하고 있는 한씨를 찾아갔다. 한씨는 그동안 티비에서 보여줬던 재기 발랄함 대신 시종일관 진지한 자세로 인터뷰에 응했다. 한씨는 10년 전 부모님과 함께 미국으로 이민 왔지만, 국적은 한국이다. 그는 장애우들을 위한 비영리단체 '뉴욕 밀알 선교단'(단장 김자송)에서 간사로 근무했으며, 선교단을 위한 기금 마련을 위해 '아메리칸 아이돌' 오디션에 참가했다고 밝혔다.
다음은 한희준씨와의 인터뷰 일문일답 요지이다.
"오디션 넘버도 8002번, 타고 간 자동차 번호도 8002번"
'아메리칸 아이돌'(American Idol)이란? |
시청자와 심사위원들 앞에서 자신의 노래 실력을 뽐낸 뒤 순위를 가리는 미국 폭스 텔레비전의 연예인 오디션 프로그램이다.
본래의 프로그램 형식은 영국(Pop Idol, 2001년)에서 차용하였으며, 2002년을 시작으로 2011년까지 10명의 우승자가 탄생했다. 이들은 모두 각종 차트(특히 빌보드 차트)를 석권했으며, 막강한 미국 음반시장의 지원 속에 전 세계적으로 음악활동의 영역을 넓혔다.
한국의 대표적인 오디션프로그램 '슈퍼스타K'의 원조 격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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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메리칸 아이돌'에서 뛰어난 재치와 유머감각을 보여줬다. 실제 본인의 모습은?"오버하지 않고, 억지로 웃기려고 하지 않고, 굉장히 평범한 사람이다. 기회가 주어지면 그 자리에서 끝을 보지만, 그렇지 않으면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하는, 정말 아무 곳에서나 볼 수 있는 전형적인 한국 사람이다."
- 평범했던 사람이 한인 최초 '아메리칸 아이돌' '탑 9'까지 올랐는데."지난해 6월 피츠버그에서 처음 오디션에 참가했을 때 제 넘버가 8002번이었다. 피츠버그에 온 1만여 명의 참가자 중에 제가 8002번째로 오디션을 본 거다. 그런데 제가 피츠버그까지 타고 간 자동차 넘버도 8002번이었다.(웃음) 그때부터 지금 여기 앉아 있는 이 상황까지 모든 게 수월하게 진행이 되더라. 사람들이 '와, 좋겠어요. 실감이 안 나죠?'라고 많이들 물어본다. 하지만 정말 가파른 것 없이 수월하게 왔기 때문에 너무 좋다거나 흥분되거나 하는 것은 전혀 없었다."
- '탑 8' 문턱에서 실패가 결정됐을 때 심정은?"사람들이 행복을 보는 기준이 다른 것 같다. 오디션에 참가했던 몇십만 명의 사람들과 그것을 TV를 통해 지켜보는 사람들의 행복의 기준은 성공이기 때문에 그 사람들은 1등이 가장 중요하다. 그러나 제 성공과 행복의 기준은 1등이 되는 게 아니었다. 뉴욕 밀알 선교회 장애우 친구들을 돕고 기부금을 모으기 위해 시작한 것이기 때문에 10위 안에 들었을 때 이미 제가 원했던 것들이 어느 정도 이뤄졌다. 사실 제가 있어야 할 자리가 9등이든, 8등이든, 7등이든 상관하지 않았다. 9등이 저에게는 1등 같고, 그냥 그렇다."
- '탑 8' 진입은 실패 했지만 오히려 많은 미국 언론으로부터 스타 대접을 받고 있는데?"오디션이 끝나면 ('탑 10'까지 오른) 참가자들이 전국 투어 콘서트를 한다. 그 투어 콘서트 홍보를 하기 위해 떨어진 참가자들을 미국의 각종 매체에 출연시킨다. 기본적인 매체가 있고, 거기에 몇 개의 매체가 더 추가가 되는데, 저는 다른 친구들보다 더 많이 추가가 됐다. 조금 이례적이라고 하더라.(웃음)"
- 아무리 욕심이 없었다고 하지만, 그런 스타 대접을 받으면 기분이 들 뜰 것 같은데."그렇다. 사람들이 알아봐주고, 사진 찍으려고 하고, 어디를 가도 특급 대우를 받았다. 이전까지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다. 마지막에는 말도 안 되게 어마어마한 아이돌 저택에서 일주일 동안 살았다. 하지만 그곳에 살면서도 항상 어떤 재물이 주어지든 그 재물에 제 자신을 팔지 않으려고 노력을 많이 했다.
저택이 주어지든, 돈이 주어지든, 명예가 주어지든 그것은 저를 배부르게 할 수 없다는 것을 너무 잘 알기 때문에 처음부터 먹지 않았다. 내가 여기에 있는 이유, 내가 노래를 부르는 이유를 되짚어 보면서 계속 다른 곳을 보고 다른 것에 집중하려고 노력했다. 그것도 저에게는 하나의 훈련이었다."
- 그런 생각을 한다는 자체가 결코 평범해 보이지 않는데, 그런 한희준을 만든 요인은 무엇인가?"지난 2009년부터 2011년까지 2년 동안 한국에서 가수 활동을 하려고 많은 노력을 했다. 고생을 많이 했지만 결국 실패했고, 그 실패로 인해서 너무 많이 아팠다. 정신적으로도 많이 고통스러웠는데, 그때 많이 단련된 것 같다. 그래서 이제는 '나만을 위해서 내 꿈을 이루게 된다면 배가 부를 수 없겠구나' 하고 깨닫게 됐다. 제 나이 때 되면 그런 것을 다 깨닫게 된다고 하더라.(웃음)"
- 나이에 비해 상당히 조숙한 것 같다. 한국에서의 실패로 우울증까지 겪었다고 하던데."한국에서 일이 잘 풀리지 않은 채 돌아왔더니, 이미 다른 친구들은 나름대로 자리를 잡고 자기 발전을 이뤘는데, 저는 아무것도 해놓은 게 없다는 상실감이 우울증으로 발전한 것 같다. 그러나 이후 뉴욕 밀알 선교단에서 일하면서 우울증을 치료했다."
- 왜 한국에서 활동하려고 했나?"지금 생각하면 바보 같은 선택이었지만, 그 당시에는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한국 사람은 미국 엔터테인먼트에서 성공할 수 없다는 관념이 너무 강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그래서 한국으로 가는 게 맞는 것인 줄 알았다. 그리고 한국어가 제 모국어이고, 외국어를 아무리 잘한다고 하더라고 벽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한국으로 갔다. 그러나 결국 실패했다. 아니, 실패라고 하기에도 뭐 할 만큼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고 돌아왔다.(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