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8년 10월 28일 구국여성봉사단 시절 자연보호 활동을 벌이고 있는 현 박근혜 새누리당 비대위원장.
새마음의 길
1978년 10월 28일 남들은 다 띠 두르고 맨손으로 일하는데, 본인만 영국 귀족 스타일의 버버리 차림에 하얀 장갑을 끼고 서 있는 장면이나, 업스타일 머리로 불교계 대표를 영접하는 장면, 또 한국수출산업공단 새 마음 갖기 실천대회를 열고 사람들을 도열시킨 뒤 연단 위에서 박수 치는 장면을 보면, 박 위원장은 정말 그 시대 '특별한 대접'을 받고 산 사람이라는 게 느껴집니다. 사진만 봐도 '레귤러'와 '스페셜'은 딱 분간이 되니까요.
당시 스물일곱의 박근혜 총재는 구국여성봉사단 명의로 '새마음 갖기 운동'을 펼치면서 충·효·예를 강조했습니다. 훗날 구국여성봉사단은 새마음갖기운동본부로 이름이 바뀌지만, 핵심이 되는 '정신순화운동'에는 변함이 없었습니다.
무엇보다 박 위원장은 당시 이 운동에서 국가주의를 강조합니다. 그는 이 책을 통해 "우리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무슨 일을 맡아 하든지, 항상 충을 마음에 간직하고 충을 최대의 가치로 앞세우며 일할 때, 꿈은 지금 당장이라도 실현될 수 있다"며 "충은 국가 전체를 복되게 하고, 그 복됨은 우리 전체에 보다 큰 행복을 나누어 줄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이어 박 위원장은 "충효 사상은 물질만능의 병폐를 치료할 수 있는 힘"이라며 "우리 선조들이 물려준 충효 정신을 '새마음 갖기 운동'의 기초로 삼는 것은 우리나라만 할 수 있는 정신순화운동의 특징"이라고 강조했습니다.
아버지 박정희 전 대통령이 1972년 자신의 영구집권을 위해 유신헌법을 만들고, 여기에 반대하는 모든 이들을 감옥에 가두고 고문하며 심지어 죽이기까지 했던 독재의 그늘을 이른바 정신순화운동이라는 이름으로 무마하려고 했던 것일까요.
영부인 정치와 유신독재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는 "박정희가 새마을 운동의 상징이면 박근혜는 새마음 운동의 상징"이라며 "살벌한 박정희 독재체제하에서도 이른바 '영부인 정치'로는 박근혜가 좋은 일도 많이 했다는 일종의 이미지 정치"라고 설명했습니다.
이어 한 교수는 "전두환 시절에도 이순자씨가 새세대 심장재단이라는 것을 만들어 심장병 어린이들을 돕는 활동을 했었다"며 "살벌한 군사독재 시절에도 영부인은 국민들을 위해 아주 따뜻하고 좋은 일을 한다는 식의 미화"라고 비판했지요.
한 교수의 말대로 이 책이 출간되던 1979년은 한국정치의 암흑기였습니다. 김영삼 당시 신민당 총재가 국회의원직에서 제명됐고, 이 사건은 부마항쟁으로 이어졌습니다.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은 파리에서 의문의 실종을 당했고, 10·26 사태가 났지요.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박정희 대통령의 심장을 겨눈 해가 바로 1979년입니다. 정말 살벌했던 때지요.
정해숙 전 전교조 위원장은 박근혜 구국여성봉사단 총재의 활동을 이렇게 기억합니다. <한겨레>에 털어놓은 구술을 통해 밝힌 1978년 겨울의 어느 날은 이랬습니다.
"광주 북성중학교로 옮겨온 78년 겨울 어느 날이었다. 교무주임이 '선생님이 보셔야 한다'며 공문을 들고 왔다. 읽어보니 박근혜 당시 구국여성봉사단(훗날 새마음운동본부) 총재가 광주 실내체육관에서 '새마음갖기대회'인지 '새마음중고생연합회 발대식'인지를 하는데 참가자로 내 이름을 지명해 놓은 것이었다. (중략) 나는 공문을 보자마자 가기 싫다고 얘기했다. 그랬더니 교무주임은 이름이 명시된 공문이어서 자기도 어쩔 수 없다고 했다. (중략) 그렇게 예행연습날이 되었다. 하지만 도저히 갈 수가 없어 도서관 직원에게 '대리 출석'을 부탁했다. 퇴근시간이 조금 지나자 예행연습에 갔던 직원이 돌아와 '총재님이 오시는 내일은 복장을 곤색이나 검정색 정장을 하고 오라 했다'고 전해주었다. 그는 언제 경례를 하고, 언제 자리에 앉는지 등등 예행연습한 내용도 알려주었다. 충효예를 내세운 행사에서 27살의 젊은 총재가 퇴장할 때 환갑을 바라보거나 넘은 교장·교감·교사·교수들이 양쪽으로 줄지어 서서 90도로 절을 하도록 예행연습했다니 도저히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이 연출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