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사탑. 뒤로 수로왕비릉이 보인다.
정만진
수로왕비릉에 가면 5층 파사탑부터 먼저 보게 된다. 묘역 안으로 들어섰을 때 왕비릉 앞에 서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파사탑은 본래부터 이 자리에 있었던 것은 아니다. 삼국유사는 이 탑이 본래 '금관(金官)의 호계사(虎溪寺)'에 있었다고 말한다. 김해에 있었던 수로왕의 가야국을 금관가야라 하므로 금관은 곧 김해를 뜻한다. 따라서 호계사는 김해 시내에 있었다.
불교 탄압 심했지만 파사탑 온전해 천만다행
호계사는 1873년에 없어진 것으로 전해진다. 하지만 절이 있었던 정확한 위치는 기록으로 남은 것이 없어 아무도 알지 못한다. 성리학을 숭상하고 부처를 불씨(佛氏)로 낮춰 불렀던 조선 시대에 사라져버린 사찰이 워낙 많으니 폐사(廢寺)의 역사를 제대로 기록한 사람도 없다. 그래도 다행한 것은 파사탑이 수로왕비릉 경내로 옮겨져 무사히 보존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파사탑은 삼국유사 중 '금관국 파사탑' 부분에 '수로왕의 비(妃) 허황후(許皇后) 황옥(黃玉)이 서역(西域)의 아유타국에서 배로 싣고 왔다'고 기록되어 있다. 우리나라의 돌을 써서 우리나라 사람이 만든 것이 아니라, 아유타국에서 완성되어 바다를 건너온 탑이라는 뜻이다.
삼국유사는 그 근거로 '닭벼슬의 피를 찍어서 (돌에 발라보는) 시험(까지) 했다'고 말한다. '희미한 붉은 무늬가 있고 품질이 매우 좋은' 파사탑의 돌에 닭벼슬피를 바르면 핏기가 오랫동안 남아 있는데, 우리나라에는 그런 돌이 없다는 것이다.
파사탑의 돌이 인도에서 생산되는 돌이라는 것 외에, 수로왕릉의 정문에 서로 마주보는 물고기 두 마리가 그려져 있는 것도 허황후가 인도의 아유타국에서 왔다는 근거로 여겨진다. 물고기 두 마리를 서로 바라보게 배치하는 그림은 인도 갠지스강 중류의 '아요디아' 지역 일대에 예로부터 전해져오는 고유 문양(文樣)이기 때문이다.
즉, 허황후가 아요디아(아유타국) 또는 아유타국이 태국에 거느렸던 식민지 아요티야에서 바다를 건너 곧장 가야에 왔거나, 아니면 중국을 거쳐서 오지 않았다면 어떻게 아득한 그 옛날 인도의 전통 문양이 가야로 전파될 수 있었겠느냐는 추리인 것이다(중국을 거쳐서 왔다고 보는 견해는 수로왕비의 시호가 '보주태후'라는 데에 근거를 둔다. 중국 사천성의 보주와 지명이 같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