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형왕릉에서 1.4km를 걸어오르면 류의태약수터가 0.2km 밖에 남지 않았다는 이정표가 세워져 있다.
정만진
그렇게 보면, 구형왕은 아들들, 신하들, 그리고 신라왕 들에게서 두루 명망을 얻고 있었을 법하다. 그들은 하나같이 자신들의 체면과 이익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왕의 유언을 고이 지켜주었다. 이는 구형왕에 대한 충성심과 배려심이 대단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상대도 되지 않는데도 무리하게 전쟁을 계속하여) 무고한 백성들이 참혹하게 죽도록 하는 것은 왕으로서는 차마 할 수 없는 일'이라는 <삼국사기>의 표현은 경순왕의 생각이지만, 그의 돌무덤 유언이 존중된 것을 보면 끝까지 싸우지 않고 스스로 나라의 문을 닫은 구형왕의 결정이 자신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백성들을 살리기 위한 고육책(苦肉策)이었음을 인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백성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평소에도 분명한 왕이었기 때문에 아들, 신하, 그리고 가야의 유민들이 그의 유언을 고스란히 지켜주었을 것으로 추측된다는 말이다.
구형왕이 수정궁을 산 중턱 높은 곳에 지은 까닭그런 추측을 바탕으로, 거의 왕산 정상부 턱밑에 수정궁을 짓고 산 말년의 구형왕이 하인들에게 저 산 아래까지 가서 식수를 길러오라고 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상상을 해본다. 아니, 왕은 처음부터 수정궁 바로옆에 대단한 약수가 펑펑 솟아난다는 사실을 알고서 그 자리에 집을 지었을 것 같다. 흔히 보는 약수터들은 대부분 물이 졸졸 흐르는 수준인데, 수정궁 옆 약수터는 바가지로 퍼붓듯이 생수가 펑펑 쏟아진다. 그만 하면 수정궁의 식수는 물론이고 다른 문제들도 모두 해결하고도 남을 만큼 충분한 수량이 되고도 남는다는 판단을 왕은 하지 않았을까. 그것도 그냥 물이 아니라 최고의 약수임에야!
구형왕릉에서 30분가량 숲 사이로 난 산길을 오르면 '류의태 약수터'에 닿는다. 물론 '김유신 사대비(射臺碑)'를 지나면서 바로 나타나는 왼쪽 임도(林道)로 올라도 약수터에 닿는다. 산길과 임도는 중간쯤에서 만나고, 임도는 산 위쪽으로 계속 되지만 수정궁터와 약수터로 가는 화살표가 길가에 세워져 있으므로 찾지 못해 헤맬 일은 없다.
류의태가 누구인가부터 살펴보아야겠다. 그냥 약수터가 아니라 '류의태 약수터'라 하는 것을 보면 여기서는 류의태라고 하는 사람이 매우 중요하다. '류의태 약수터'에 대한 안내판이 구형왕릉 입구에도 있고 약수터 바로앞에도 있으므로 그가 어떤 인물인지를 알아보는 것은 쉬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