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연 야고버 신부님천주교 대전교구 태안본당 초대 주임이셨던 고대연 야고버 신부님. 남미 콜롬비아 출신으로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로 한국에 오셨다. 고대연이라는 한국 이름을 가졌고, 한국어가 유창했다. 신부님 모습 너머로 백화산의 헐벗은 모습이 보인다.
지요하
그때 나는 40주년의 가장 의미 있는 행사로 초대 주임이셨던 콜롬비아의 고대연 야고버 신부님을 초청할 계획을 세우고 고 신부님의 소재지를 파악하기 위해 여러 곳으로 수소문을했습니다. 태안성당 공소시절의 본당인 서산 동문성당의 당시 주임이셨던 오일복 요한(프랑스인, 은퇴 후 논산 '성모마을'에서 중증장애인들을 돌보며 사시다가 2004년 별세) 신부님과 50년 만에 통화를 했고, 서울 서대문구 충정로 2가에 있는 파리외방전교회 한국지부 본부와도 여러 번 통화를 한 끝에 결국에는 은퇴하신 전 안동교구장 두봉 주교님의 도움 덕분에 고 야고버 신부님의 콜롬비아 내 소재지를 알게 되어 편지를 보낼 수 있었지요.
태안본당 공동체가 새 성전을 건립하는 일에 몰두하는 등 여러 가지 사정 때문에 고대연 야고버 신부님을 끝내 초청하지는 못했지만, 한국어를 다 잊으셨다는 고 야고버 신부님의 영문 편지를 이메일로 받아 본당 주보에 소개할 수도 있었고, 신부님이 가지고 계시는 1960년대 중반의 많은 사진들을 통째로 이메일로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 사진들을 내 컴퓨터 그림 방의 '고 신부님'이라고 이름 지은 폴더 안에 온전히 저장을 해놓았지만, 또 언제부턴가 그 사진들을 내 뇌리에서 잊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어찌어찌 하다 보니 또 금세 몇 년이 흘렀습니다. 사람 사는 거, 참 덧없다 싶습니다. 금세 잊고, 순식간에 몇 년이 지나고, 그러다보면 어느덧 황혼 길에 다다르는 게 인생이지 싶기도 합니다.
<2>얼마 전 우연히 '고 신부님'이라는 폴더 안의 사진들이 생각나서 60년대 중반의 풍경 속으로 들어가 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노상 컴퓨터 앞에서 살다시피 하면서도 바로 눈앞의 그 풍경들을 왜 잊고 살았는지, 그 무심함 속에서 또 순식간에 몇 년이 지나가버렸다는 사실에 기이한 당혹스러움과 혼곤함에 빠지기도 했지요.
60년대 중반의 풍경들을 구경하자니 이런저런 추억들이 고구마 캐어지듯 주렁주렁 떠오르더군요. 그래서 일단은 혼자 실컷 추억여행을 즐겼습니다.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은 감회와 눈물이 핑 도는 슬픔과 그리움들을 많이도 체감했지요. 그리고 몇 가지 추억들을 추려 소박한 글을 몇 개 써보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나는 오늘의 이 글을 쓰기 전에 다시 한 번 내 컴퓨터 안의 60년대 중반의 풍경들을 유람하면서, 이번에는 백화산 풍경에 오래 눈을 주었습니다. 그 풍경 속에 길래 머무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백화산의 60년대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일종의 죄의식이 몽글몽글 피어오르고, 어린 나무꾼의 모습이 뚜렷이 오버랩 되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소년 시절에 나무꾼이었습니다.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산에 가서 나무를 해왔습니다. 제 나이에 학교를 들어갔으니 2학년이면 아홉 살이었습니다. 지금 아이들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일 테지요. 처음에는 빈 가마니를 반으로 접고 새끼로 묶어 어깨에 메고 바구니를 하나 들고 산으로 가곤 했습니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산으로 가는 게 일이었습니다. 나무에서 떨어진 꼼방울(솔방울)들을 주워 바구니에 담아 가마니에 붓곤 했지요.
반 가마니 정도 솔방울이 채워지면 그것을 나무 등걸 같은 데다 올려놓고 새끼 멜빵을 메고 일어서서 마리지고개를 넘어오곤 했습니다. 집에서는 내가 주워온 솔방울로 아궁이에 불을 피워 밥을 지어먹곤 했지요.
처음에는 그렇게 솔방울을 주워오다가, 작은 갈퀴를 가지고 가서 솔꼴(솔잎)을 긁어 담아왔는데, 벌거벗은 산들이라서 솔방울도 솔잎도 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나중에는 도끼와 괭이를 가마니에 넣어 가지고 다니며 크고 작은 나무 등걸들을 캐오는 일도 하게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