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누리당 박근혜 비상대책위원장이 19일 오전 국회에서 열린 비대위회의에서 모두발언을 하고 있다. 왼쪽은 김종인 비대위원.
남소연
종합적인 새로운 국가건설의 급진적 비전을 가진 세력은 상황에 따라 점진적인 개혁 방식을 취할 수 있다. 그러나 현 체제 내부에서 타협과 양보에만 익숙한 세력은 급진적 경로로 나아갈 수 없다. 사실상 많은 이들이 2012년을 기대했던 것이 단순한 증오와 복수의 성공이 아니라 지금과는 체제적으로 다른, 새로운 국가모델로의 진전이라면, 이제까지 야권이 보여준 모습은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
야권 단일화의 양대 축인 민주통합당과 통합진보당은 지난 3월 10일 공동정책합의문을 채택하고 새로운 대한민국을 약속했지만, 모두 87년 체제의 틀 속에서 맴도는 것일 뿐 이것을 넘어서려는 비전은 찾아보기 어렵다. 한미FTA나 남북문제 등 몇 가지 사항을 제외하면 지금의 질서와 체제의 수호자임을 자임한 새누리당 역시도 수용할 수 있는 것들이다.
놀랄 일이 아니다. 새누리당이 거리 곳곳에 설치해 놓은 현수막에는 그들이 그토록 경멸해 마지않던 강렬한 종북좌파적 붉은 바탕 위에 이렇게 써 놓았다.
"복지, 일자리, 경제민주화, 국민이 바라던 변화 새누리당이 만들겠습니다."이것은 단순한 구호가 아니다. 자신들만이 진정한 변화를 실현할 수 있는 세력이라는 메시지다. 그들은 자신들이 전통적 색깔을 버리고 과거의 이미지와 정 반대의 색깔도 기꺼이 수용할 줄 아는 혁신의 주체이며, 현 체제에서 할 수 있는 것이라면 어떤 세력보다 잘 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국민에게 보내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 그들은 정치적 생존을 위해서라면 염치 따윈 아랑곳 하지 않는 끈질긴 생명력의 소유자다.
반면 야권은 변화를 이야기하고 있지만, 그 폭은 협소하다. 여전히 제주 강정마을의 군사기지와 한미FTA에 책임이 있음에도 무엇이 변했는지, 생각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확인할 길이 없다. 어떤 미래를 그리고 있는지, 마냥 듣기 좋은 정책 몇 개만으로는 이해하기 쉽지 않다. 게다가 필요에 따라 연대의 대상에게까지 자행하는 철지난 색깔론은 도대체 누가 변화의 주체이고 대상인지조차 회의하게 만든다.
야권, 총선 직후 체제수준의 담론 준비해야총선이 한 달도 남지 않은 상황에서, 지금 당장 무슨 비전을 제시하라는 것은 현실적이지 않은 요구다. 언론과 전문가들이 '현실 가능한 정책'을 요구하는 상황에서, 새로운 체제 운운하는 순간 '허황된 공약'이라는 맹공격이 예상되는 상황에서, 체제 수준의 담론을 제기하자는 것이 순진한 발상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총선이 끝난 이후에도 체제 수준의 담론을 제기하고 신국가의 비전을 제시하지 못한다면, 정치 허무주의와 냉소주의의 확산은 속도를 낼 것이다. 이미 적지 않은 이들이 반MB와 반새누리당 이외의 별다른 쟁점이 형성되지 못하고 새로운 국가비전을 파악할 수 없는 모호한 선거운동에 피로감을 느끼고 있다. 그동안 꾸준히 활동해온 역동적 시민과 평범한 보통 시민 간의 괴리감이 넓어지고 있는 듯한 징후도 보인다.
총선 이후에는 체제수준의 비전을 먼저 제시하는 세력이 대중의 관심을 끌어내고 주도권을 발휘하게 될 것이다. 총선에서 역관계가 바뀐다면, 증오정치 만으로 대선까지 돌파하기란 쉽지 않다. 그런 점에서 2012년의 대선은 다양한 수준의 개헌 논의를 비롯한 거대담론의 각축장이 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런 예측이 시사하는 바는 1987년 이후 처음으로 우리가 '증오의 정치'가 아니라 미래의 비전을 둘러싼 '희망의 정치'가 각축하는 대선을 경험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지긋지긋한 87년체제의 쳇바퀴 속에서 반복되는 일상에서 벗어나 새로운 희망을 대안체제의 모습 속에 투영시켜 볼 수도 있는 것이다.
증오의 정치가 지배하는 한국 정치를 희망의 정치로 전환시켜 내는 것은, 1차적으로는 정치권의 몫이다. 지금은 1대 1 선거구도를 만들어 구시대의 유산을 심판하는 것에 치중할 수밖에 없었더라도, 총선 이후 우리가 나아갈 새로운 국가비전을 제시해야만 한다. 이를 위해서는 '벌써부터'라도, '설레발'이라도, 야권 역시 총선 이후에 제기할 체제담론을 준비해 놓아야 한다. 단일화에 마냥 들떠 있을 때가 아니다.
그러나 설령 현실정치세력이 그 역할을 수행하지 못한다 해도 그 임무는 시민사회로 넘어가야 하는 것이지, 그냥 사라져야 할 것은 분명 아니다. 증오의 정치로 인해 희망이 곧 실망으로, 열정이 곧 좌절로 거듭되어 왔던 한국 정치의 고질적 악순환을 끊는 임무를 정치권에만 맡겨 놓을 필요는 없다.
증오의 정치를 넘어선 그곳을 상상할 때, 일상에 파묻혀 잠시 식어버린 심장이라도 다시 뜨겁게 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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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보다는 공통점을 발견하는 생활속 진보를 꿈꾸는 소시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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