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위 0.3% 진입을 위한 아이들의 '미친 욕망'

시험지를 훔친 A외고 모범생과 연극 <모범생들>

등록 2012.03.10 21:50수정 2012.03.14 1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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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속 이야기는 때로 현실이 되기도 한다. 지난 2월 막을 올려 4월까지 상영 예정인 연극 <모범생들>을 보며 든 생각이다. 그 이유는 연극 내용이 최근 발생한 A외고 시험지 절도 사건(관련기사 : 퇴학당한 외고 1등, 비극적 사건의 전말)과 상당 부분 닮았기 때문이다.

출세욕의 다른 이름... '서울대'


 연극 <모범생들> 중
연극 <모범생들> 중(주)이다엔터테인먼트

연극 <모범생들>과 A외고 사건 모두 외고를 배경으로 한다. 사건사고가 거의 없는 외고에서의 부정행위란 점도 같다. 뿐만 아니라 그 부정행위의 주인공이 매우 의외의 인물이란 점까지 동일하다.

<모범생들>의 세 모범생 명준, 수환, 그리고 민영은 단정한 교복과 뿔테 안경, 그리고 책상에 앉은 모습이 잘 어울리는 '모범생들'이다. A외고에서 시험지를 훔친 학생 역시 평소 착실하고 성적이 전국 최상위권인 '모범생'이었다. 그런 모범생들이 무슨 이유로 부정행위를 한 걸까.

여기서 우리는 연극과 A외고 사건이 갖고 있는 또 하나의 공통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모범생들'의 중심 인물인 명준이 고민 끝에 부정행위를 마음먹은 것은 '서울대' 때문이었다. 그리고 A외고에서 시험지를 훔친 학생 역시 서울대에 대한 부담이 매우 컸다. 

본래 시험의 목적은 학습의 과정 중 성취 정도를 파악하는 데 있다. 하지만 그것은 그야말로 교육학 수업 시간에나 어울릴 비현실적인 얘기다. 대한민국에서 시험의 가장 중요한 지향점은 '대학'이 돼버린 지 오래다. 특히 '외국어 특수 목적 고등학교'는 '입시 특수 목적 학원'의 준말이 아닐까 의심스러울 정도로 입시 중심의 교육을 한다. 또 서울대는 신입생 선발 시 중간, 기말고사의 전 과목을 높은 비율로 반영한다.

이런 상황에서 A외고 학생의 시험지 절도 사건에는 단순히 시험을 잘 보고 싶은 것뿐 아니라 내신 상위권 등급을 확보해 서울대에 '안전하게' 입학하려는 의도가 담겨 있다고 보인다. 그리고 '서울대에 대한 바람' 이면에는 연극에서처럼 상위 3% 또는 상위 0.3%에 대한 바람이 숨어 있는지도 모른다.


대한민국 상위 0.3%를 꿈꾸는 아이들

연극 <모범생들>, 조금 불쾌했다
연극 <모범생들>에서는 공부 못하고 싸움질만 하고 다니는 종태와 민준, 수환, 민영이라는 세 모범생들을 대조적으로 그린다.

'똑똑한' 아이들은 부정행위가 드러났을 때 종태를 설득해 모든 것을 뒤집어쓰게 하는데 순순히 이를 받아들인 종태는 마지막에 커닝을 거부함으로써 '비도덕적인 모범생'이 아닌 '도덕적인 문제아'를 택하게 된다. 그리고 10년 뒤 성공한 엘리트 민준들 앞에서 종태는 말한다.

"나? 그냥 카센터 하고 있어. 난 그냥 땀흘린 만큼만 벌고 있어."

그런데 이 대사에서 나는 심한 거부감이 생겼다. 작가는 '폭력적이고 무식한 문제아 종태보다 백색 누아르를 펼치는 나쁜 엘리트들이 더 무섭다'고 말하고 싶었겠지만 완전히 공감은 안 됐기 때문이다.

각각 회계사와 보좌관과 검사가 된 이들은 고시 패스 등을 통해 어쨌든 자신의 노력으로 사회적 지위를 얻었다. 그러나 종태의 카센터는 돈 많은 부모님을 통한 성취다. 더욱이 종태는 외고에 '잔디 깔고' 들어온 것으로 설정돼 있다. 그렇다면 종태를 단순히 '도덕적인 문제아', '공부는 못하지만 착한' 캐릭터로만 볼수는 없지 않을까?
연극 <모범생들>에서 명준은 '상위 3%의 내신'을 위해 커닝을 시도한다. 하지만 보다 근본적인 이유는 '상위 3%의 인생'에 있다. 상위 3%가 되기 위해선 '적성도, 흥미도 필요 없이' 어떤 학과든 서울대에 들어가야만 한다. 그래서 상위 3%의 내신이 필요하다.
연극 속에서 반장 민영은 명준보다 더 높은 꿈을 갖고 있다. 명준이 민영에게 함께 커닝을 하자고 제안했을 때 민영은 이를 완강하게 거부하는데 그건 커닝이 옳지 않다고 생각해서가 아니다. 민영은 말한다.


"난 너희와는 태생이 달라. 3%? 나는 0.3%야! 너희들이 군대갈 때 나는 어학연수 갈거고, 너희들이 취직하면 난 회사를 차릴 수도 있어. 너희가 적금 부을 때 나는 그 적금 만기액 만큼의 연봉도 받을 수 있어. 어쩌면 나는 슈퍼맨도 될 수 었어! 교문 밖 세상이 그렇게 호락호락할 것 같냐?"

말 그대로 민영의 성적은 상위 0.3%다. 게다가 명문가의 아들이란 배경까지 갖고 있다. 급이 달라도 한참 다른 민영은 커닝에 있어서도 급이 달랐다. '세 장'의 돈을 주고 시험지를 매수해온 것이다. 이런 민영에 비하자면 명준과 수환의 수신호 커닝은 귀엽기까지 하다. 이렇듯 태생이 다르고 '급'이 다른 민영은 누구와도 손을 잡을 생각이 없는 것이었다.

결국 연극 속 모범생들이 단정하고 착실하게 공부하는 이유, 모범생인 이유는 정해진 어떤 수준의 삶을 살기 위해, 즉 특정 계층에 오르기 위해서다. 그들에게 있어 학교, 공부, 시험의 존재 목적은 계층 상승 또는 유지에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이 바로 이들이 부정행위를 하면서까지 그토록 시험 점수와 등수에 집착하는 진짜 이유다.

A외고 모범생에게 엄중한 처벌이 필요한 이유

 A외고 2층 복도 벽에 걸린 대학 진학정보게시판.
A외고 2층 복도 벽에 걸린 대학 진학정보게시판. 윤근혁

공부가 계층 서열화의 도구가 돼버린 사회. 그래서 상위 3%든 0.3%든 어쨌든 계층 피라미드 꼭대기를 점령하기 위해 친구들끼리 살벌한 경쟁을 하며 배틀로얄을 펼쳐야 하는 사회. 그 가혹한 세상을 만들어낸 우리 어른들이 심적 부담을 견디지 못해 반칙을 한 아이를 비난할 자격이 있을까.

우리 사회 어른들 대부분은 모르긴 몰라도 이 구조를 바꾸지 못한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A외고의 한 교사는 제자의 부정행위를 비난하기 앞서 "자살하는 것보다 차라리 절도가 낫다"라고 말했는지 모른다. 또 A외고 교사들은 지금까지 '모범생'이었던 이 학생의 처벌에 대해 고민했을지 모른다. 학생의 장래를 위해 퇴학까지는 내리지 않고자 회의에 회의를 거듭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학교는 퇴학을 결정했다. 가슴 아프지만 그 결정은 매우 다행스런 것이다.

만일 평소 '모범'적이었던 성적과 생활을 이유로 또는 '서울대' 합격 가능성과 '전도유망한 장래'를 위해 학생의 잘못을 눈감는다면? 그 학생은 무난히 서울대생을 거쳐 사회지도층이 되겠지만, 그것은 매우 위험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그 위험한 결과를 우리는 연극 <모범생들>을 통해 미리 만나볼 수 있다.

 연극 <모범생들> 포스터
연극 <모범생들> 포스터(주)이다엔터테인먼트
연극 <모범생들>은 커닝을 시도한 외고생들의 미래도 그리고 있다. 부정행위가 발각되자 다른 학생(종태)에게 모든 것을 뒤집어씌우고 마지막까지 모범생으로 남은 세 모범생들.
10년 뒤, 명준은 회계사, 수환은 보좌관, 그리 반장 민영은 검사가 돼 높은 계층의 삶을 살고 있다. 그러나 연극은 서로의 명함과 명품지갑을 힐끗거리는 등 명준과 수환의 속물적인 모습을 반복적으로 드러냄으로써 관객들에게 소리 없이 말한다. '학창시절 부정행위를 학습한 엘리트들은 피라미드 위쪽 자리를 지키기 위해 또 다른 부정행위들을 저지를 수 있다'고.

연극의 이 메시지는 시험지를 훔친 A외고 학생과 관련해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어쩌면 뛰어난 성적으로 소위 명문대에 가고 높은 지위에 오를 가능성이 높은 학생이기 때문에라도 그 학생에겐 제대로 된 처벌과 도덕교육이 필요하다. 단순 폭행이나 절도를 저지르는 이들보다 사회 지도층의 합법적 절차를 통한 '백색 누아르'는 더욱 무서운 것이니.

이런 이유들로, 오죽하면 그랬을까 싶지만 그래도 A외고 학생에게 내려진 처벌은 정당한 것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그 엄중한 처벌을 통해 학생이 많은 것을 깨닫고 새롭게 마음을 다지기를, 그리고 우리사회의 진정한 엘리트로 성장할 수 있기를 바란다.
#외고 시험지 절도 #외고 컨닝 #모범생들 #외국어고 #중간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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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사회과 교사였고, 로스쿨생이었으며, 현재 [법률사무소 이유] 변호사입니다. 무엇보다 초등학생 남매둥이의 '엄마'입니다. 모든 이들의 교육받을 권리, 행복할 권리를 위한 '교육혁명'을 꿈꿉니다. 그것을 위해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로 글을 씁니다. (제보는 쪽지나 yoolawfirm@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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