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락국기비각구형왕릉 들어가는 산길 입구, 김유신 사대 맞은편에 가락국에 관한 기록이 새겨진 비와 비각이 있다.
정만진
경순왕조의 '(고려 태조에게 항복하러 가는 경순왕 일행의) 향나무 수레와 구슬로 장식한 말이 30여 리에 이어지니 길이 막히고 구경꾼은 울타리를 두른 것 같았다'는 대목과 법흥왕조의 '(금관국 임금 김구해가) 국고(國帑)의 보물을 가지고 와서 항복했다'는 말은 사용된 표현만 다를 뿐 내용은 같다.
항복을 하면서 나라의 '재정'을 바쳤다는 뜻이다. 경순왕이 항복하러 가는 길에까지 '사치'를 부렸다고 비난할 일은 아니라는 말이다. 항복하는 금관가야의 재산은 곧 신라의 것이고, 항복하는 신라의 재산은 곧 고려의 것이니, 경순왕과 구형왕이 나라의 재산 목록과 실물을 잘 챙겨서 바쳐야 하는 것은 당연지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산천 왕산(王山)의 구형왕릉 들머리에 있는 덕양전(德讓殿) 안내판에도 '구형왕이 신라 법흥왕에게 나라를 선양했다'는 대목이 있다. 금관가야의 마지막 임금인 구형왕이 싸움 없이 신라에 나라를 바쳤다는 역사적 사실에 바탕을 둔 표현이다. 선양(禪讓)은 '물려줄 선(禪)'에 '넘겨줄 양(讓)'이니 싸우지 않고 나라를 신라에 넘겼다는 뜻. 덕양전은 금관가야의 마지막 임금인 구형왕과 그의 왕비를 제사지내는 집으로, 경상남도 산청군 금서면 화계리에 있다.
구형왕이 저승에서 <삼국사기> 본다면...하지만 앞에서 살펴본 기록들은 신라 중심으로 역사를 기술한 김부식의 개인 견해가 아닐까 여겨진다. <삼국유사>의 관련 서술은 그와 사뭇 다르기 때문이다. 일연은 금관가야의 마지막 시간을 '(신라)왕이 군사를 일으켜 쳐들어 오매 (구형)왕이 친히 군졸을 부려 싸웠으나 저편은 많고 이쪽은 적어서 대전을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중략) 항복하였다'고 증언하고 있다. 구형왕이 나라를 들어 바친 것이 아니라 싸우다가 어쩔 수 없이 항복을 했다는 뜻이다. 만약 구형왕이 저 하늘에서 <삼국사기>의 기록을 본다면 그는 아마 억울하고 원통하여 다시 한 번 눈물을 흘릴 듯하다.
대전과 통영을 잇는 고속도로의 생초 나들목에서 내려 곧장 왼쪽으로 접어들면 길은 남강의 상류인 경호강을 따라 굽이굽이 이어진다. 경호강(鏡湖江)은 거울(鏡)과 호(湖)로 이루어진 이름만 보아도 짐작이 되지만, 강폭이 넓고 물이 깨끗하며, 큰 바윗돌이 없는 대신 모래톱이 크게 발달해 물살은 빠르지만 소용돌이를 치는 곳이 없다. 한강 이남 최고의 뱃놀이 명소로 이름이 높은 강이다.
아름다운 경치를 자랑하는 강을 오른쪽 겨드랑이에 끼고 4km 정도 즐겁게 달려가면 경호고등학교, 금서초등학교, 금서우체국, 농협 등이 큰 마을이 나타난다. 주요 기관 중 면사무소만 없는 이 화계리가 바로 구형왕릉, 덕양전, 왕산, 류의태 약수터 등을 자랑하는 이름난 역사 유적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