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숙사 1층 로비에서새내기 대학생이 된 조카 녀석의 기숙사 짐을 내 차로 실어다주는 일을 마치고 나서 1층 로비에서 함께 포즈를 취했다. 초등학교 6년 시절 엄마를 잃은 후 큰집에서 생활한 조카 녀석이 이제 어엿한 대학생이 되었으니 그저 대견스러울 뿐이다.
지요하
기숙사 '지관(智館)' 6층에 있는 녀석의 방에 짐들을 들여놓아주고, 사진도 찍었다. 기숙사는 2인 1실이었다. 넉넉하고 쾌적한 분위기였다. 녀석이 산뜻한 기분으로 대학생활을 잘 시작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기숙사 주차장에서 녀석과 헤어져 돌아오면서 다시금 6년 전에 세상을 뜬 제수씨 생각을 했다. "작은엄마가 살아 있다면 얼마나 좋아 하겠니!"라는 말이 절로 내 입에서 나왔다. 2002년이던가, 내 돈을 들여 제수씨를 운전학원에 다니게 했다. 그리고 면허증을 따게 했다. 그리고 틈틈이 내 차로 제수씨에게 실전 연습을 시켰다.
제수씨가 곧잘 운전을 하게 돼, 같은 연립에서 사는 제수씨에게 웬만한 일은 맡길 수가 있게 된 상황에서, 뜻밖에도 뇌혈관기형 뇌출혈로 쓰러진 제수씨를 그만 저 세상으로 보내고 말았다. 그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뇌혈관기형 뇌출혈을 전혀 알지 못했던 나와 동생의 '무지'가 통한의 아픔으로 가슴을 엔다.
"엄마가 살아 있다면 오늘 이렇게 녀석의 기숙사 짐을 실어다 주는 일도 엄마가 헐 거야. 당연히 내일 입학식에도 엄마가 올 테고…. 내일 입학식에는 우리가 다시 올 수 없으니, 녀석이 외롭게 쓸쓸할지도 모르겠다."내가 조금은 안쓰러워지는 마음으로 그런 말을 중얼거리자 딸아이가 위로를 해줬다.
"다 컸는데 뭘….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성균관대학교의 입학식이 2월 28일 오전에 있다고 해서, 기숙사 짐을 실어다 주는 일을 28일로 하루 연기하려고 했다. 아침 일찍 출발해 기숙사 짐을 방에 들여놓은 다음 입학식도 구경하고 사진도 찍어주고 할 마음이었다. 그런데 녀석은 며칠 전의 오리엔테이션에서 만난 동기들과 27일 만나기로 약속했다며 그 약속을 지켜야 한다고 했다. 나는 그 '약속'이라는 말에 각별한 느낌을 받았다. 녀석이 친구들과의 약속을 중요하게 여긴다는 사실이 남다른 신뢰심을 갖게 하는 것이었다.
<3> 외로운 아빠를 보살피겠다는 녀석돌아오는 길에 딸아이에게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나 들려줬다. 동생이 아들의 대학 등록금과 기숙사 비용을 합해 600여만 원을 지출했는데, 할머니의 걱정이 크신 것 같다는 딸아이의 말 때문에 꺼낸 이야기였다.
2003년 3월, 내가 베트남 전쟁 고엽제 후유증 판정을 받아 국가유공자가 되면서 여러 가지 혜택을 보게 되니 한 가지 불편한 생각이 들었다. 내가 과연 베트남 전장에서 고엽제에 노출되어 당뇨병을 갖게 된 것인지, 베트남 전쟁 고엽제와는 상관없이 무절제한 생활 탓에 당뇨를 갖게 된 것은 혹 아닌지, 실로 아리송한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만약 베트남 전쟁 고엽제와는 상관없이 내가 당뇨를 갖게 됐고, 또 그런 당뇨병으로 국가유공자가 됐다면 후일 이 세상 삶을 마치고 하느님 앞에 갔을 때 적이 면구스러워지리라는 생각이었다.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을 생각하다가 국가유공자 혜택을 나만 독식해서는 안 된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됐다. 그래서 국가유공자 7급 보훈연금 월 25만 원(당시)을 동생에게 나눠 주기로 했다. 두 동생 중에서 막내는 부부가 중등교사이므로 내가 신경 쓸 필요 없고, 가운데 동생은 고난도 용접기술로 높은 일당을 받지만 비정규직이라 퇴직 적림금도 없고 해서 그 동생에게 나눠 주기로 작정하고(집사람이 동의를 해주어서 감사하며) 두 조카아이 이름으로 500만 원 적금 통장을 두 개 만들어 매월 적금을 넣었다. 그렇게 해서 1천만 원을 만들어 내가 환갑을 먹던 2008년, 동생에게 아이들 대학 갈 때 학자금에 보태라고 줬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