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화문창덕궁 정문
이정근
아름답게 지어진 집, 상왕전이 되지 않을까...수강궁에 날이 밝았다. 궁노들의 발걸음이 부산하고 노산군을 호송할 군사 50여 명이 첨지중추원사 어득해의 지휘를 받으며 대기했다. 예전 같으면 호위청 군사들의 호위였지만 지금은 금부 산하 호송 군사들이다. 격이 달라진 것이다. 판내시부사 홍득경이 월대에 부복했다.
"마마! 준비가 다 되었습니다."호칭이 사라졌다. 어제까지 상왕 전하로 모셨던 분을 하루아침에 노산군이라 부르기에는 저 자신의 양심이 허락하지 않았는지 어정쩡하게 넘어갔다.
"알았다."자리에서 일어난 노산군이 좌우를 휘둘러보았다. 오늘은 볼 수 있는 공간이지만 내일은 볼 수 없다. 마음이 싸하다. 천정을 쳐다보았다. 어제와 똑같은 천정에 할아버지 모습이 그려졌다. 무서운 얼굴은 아니었지만 가까이 다가가기에는 쉽지 않은 얼굴이었다. 직접 본 기억은 없지만 할아버지로부터 많은 이야기를 전해들은 태종 할아버지였다.
"할아버지는 상왕이 좋아서 이곳에 들어오셨지만 저는 숙부가 하라고 해서 억지로 상왕이 되었습니다. 하라는 숙부가 나쁠까요? 싫다고 생각하는 제가 나쁠까요?"태종은 무슨 말인가 할 듯 하더니만 빙그레 웃음만 짓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수강궁에서 상왕을 즐기셨지만 저는 창살 없는 감옥이었습니다. 아름답게 지어진 이 집이 대대로 상왕전이 되지 않을까 저어됩니다."뼈있는 한마디에 태종은 아무 말이 없었지만 밝은 모습은 아니었다.
"할아버지가 지어주신 집에서 잘 있다 갑니다. 언제 다시 이 집에 들어올런지는 알 수 없지만 꼭 다시 오고 싶습니다."고개를 돌리려는데 또 다른 할아버지 얼굴이 어른거렸다. 언젠가 본 듯한 얼굴이었다. 세종 할아버지였다.
"할바마마! 수양 숙부가 무서워요."뛰어가 품에 안기고 싶다. 허나, 할아버지는 천정에 있다. 내려와서 머리를 쓰다듬어 줄 것 같았지만 내려오지 않고 인자한 얼굴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제 떠나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것 같아요. 저를 살려주세요."눈물이 핑 돌았다. 내려와서 손이라도 잡아주면 울음이 터질 것만 같았다, 그 때였다. 호송 군관 김자행의 굵은 목소리가 수강궁을 울렸다.
"떠나실 준비가 다 되었습니다."경칭은 없다. 앞뒤 다 잘라버리고 사뭇 명령조다. 정통 무인으로 단련되어서일까? 목소리가 건조하다. 노산군을 영월까지 호송한 김자행은 훗날 그 공이 인정되어 첨지중추원사에 승차하고 고속 승진을 거듭하여 성주목사에 올랐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승승장구하던 김자행은 애꿎은 백성을 고문한 것이 문제가 되어 의금부에 잡혀와 국문을 받고 파직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