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7일 오마이뉴스 강당에서 2011년 뉴스게릴라 시상식이 열렸습니다.
신광태
예정보다 일찍 도착했다. 18층 <오마이뉴스> 사무실은 고층용 엘리베이터를 이용해야 했다. 상기된 표정으로 기웃거리는 나를 편집부 기자들이 먼저 알아보고 반갑게 맞아주었다. 그동안 전화 통화를 했거나 광주전라 지역투어에서 만난 기자들도 있었지만 대부분 처음 보는 사람들이었다. '잘은 모르지만 친한 사람들'의 환대로 나는 금방 긴장이 풀리고 편한 마음이 되었다.
사무실 한쪽에 배낭을 놔두고 지하 쇼핑몰로 내려가보았다. 쇼핑몰에는 다행히 내게 꼭 필요한 약국이 입점해 있었다. 집 떠나오면 괜히 이유 없이 배가 살살 아파오고 소화도 잘 안되고 바뀐 잠자리로 인해 아침까지 뒤척이고 잠 못 드는 등의 제반 증상을 달래기 위해 상비약을 구비해야 했다. 내려간 김에 쇼핑몰 이곳저곳을 구경하고 나서 18층으로 다시 올라갔다. 사무실에 가보니 어느새 다른 시민기자분들이 하나둘씩 도착하기 시작했다.
서로 안면이 있는 시민기자들은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그동안 밀린 대화들을 나누는데 나는 한쪽에 앉아서 그분들의 대화를 엿들었다. 아는 사람 한 명 없고 달리 할 일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기자님. 저번 기사에 걸린 소송 건은 어떻게 돼가고 있습니까? 좀 복잡하겠던데요?""네, 뭐, 아직도 그 상태로 계류 중에 있죠. 그러는 기자님은 내용증명 수령하셨습니까?""예, 각오했던 거니까요, 뭐. 우리가 이런 일 어디 한두 번 겪습니까? 쓰는 기사마다 말도 안 되는 트집 잡아 억지 쓰는 사람들인데. 이젠 그냥 그러려니 합니다.""그렇지만 그 고충이 오죽하겠습니까. 저도 마찬가지지만요. 그렇지만 맞아요. 그런 것 일일이 신경 쓰다 보면 절대 기사 못 쓰죠."법조인들의 모임도 아니련만, 시민기자들 대화 내용이라는 것이 언뜻 들어선 살벌한 법률용어가 대부분이었다. 내가 읽고 나서 순간 통쾌함을 느끼고 비분강개하고 또는 눈물 흘렸던 한 편의 기사들이 저렇듯 개인적인 불이익과 위험을 감수하면서 쓴 고통의 산물이었던 것이다.
본격적인 시민기자 활동에 전념하겠다는 의지로 명함까지 신청해 놓고선, 그 명함을 딸한테 한 장 뿌리고 나선 책상 어딘가에 쑤셔 박아 놓은 채 여태까지 구미에 맞는 소재가 없다는 이유로 단 한편의 기사도 올리지 않고 있는 나의 게으른 집필태도가 떠올랐다.
그들이 소송과 벌금을 감수하면서 기사를 쓰는 동안 나는 즐겨찾기에 걸어놓은 이상한 할리우드 배우들 파파라치 컷 모음 사이트에 들어가서 제시카 알바와 미란다 커, 패리스 힐튼의 사생활이나 엿보고 있었다니 참으로 한심한 노릇이었다. 이런 나에게 상이라니(나는 이번에 '2월22일상'을 받았다). 너무 과분하고 민망할 일이었다. 명함은 뭐한다고 신청을 했던가 부끄러운 심정이었다.
지면으로만 뵈었던 쟁쟁한 기자분들과 오늘 행사를 축하해주기 위해 오신 내빈들의 입장으로 식장 분위기는 더욱 무르익었다.
<오마이뉴스> 편집국장을 역임하셨고 현재는 시민기자의 한 사람으로서 열심히 기사를 올리시는 정운현 기자님. 빗어올린 흰머리가 인상적인 도시농업의 선구자 오창균 기자님. 공무원 신분으로 기사를 쓰면서 고향을 홍보하는 데 열심인 강원도 화천의 신광태 기자님. 그리고 한 지역신문에서 불과 근무기간 한 달을 채우지 못하고 해직되었다는 아무개 청년 기자님.
그리고 완전 '훈남' 최병성 기자님. 최병성 기자님은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소탈하고 다정한 분이었다. 그분의 날카롭고 예리한 기사 때문이었을까. 나는 최병성 기자님에 대해 왠지 차갑고 어려운 이미지를 갖고 있었다. 그런데 사람들과 큰 소리로 인사를 나누고 처음 보는 사람에게도 먼저 명함을 내밀며 악수를 청하는 모습에서 그 기자님을 향해 품었던 막연한 선입견이 얼마나 그릇된 것이었던가를 깨달았다.
사인 받고 싶던 최병성 기자님... 이렇게 뵙다니드디어 창간 12주년 기념행사가 시작되었다. 오늘의 <오마이뉴스>를 탄생시킨 오연호 대표의 인사말에 이어 이 자리를 축하해주기 위해 모인 사람들의 축사들이 간략하게 이어졌다. 세계적으로 유래가 없는 <오마이뉴스>만의 독특한 시민저널리즘을 확실하게 뿌리 내리기까지의 그동안 기울인 고통과 노력의 시간들을 함께 다독이며 미래를 축복하는 훈훈한 시간이었다.
행사의 꽃, 시상식은 그 어느 해보다 풍성했다. '올해의 뉴스게릴라상', '특별상', '올해의 기사상', '시민기자 명예의 전당', '2월22일상' 등 다양한 상이 한 해 동안 활약한 시민기자들에게 주어졌다.
각 수상자들에게 차례로 부상이 전달되고 각자 수상소감을 한마디씩 할 기회가 주어졌다. 그 많은 수상자들이 모두 한마디씩 하게 되리라고는 예상 못했던 일이었다. 상을 받는 일도 나는 불편하고 부끄러운데 수상 소감을 준비할 마음의 여유는 더욱 없었다.
앞선 수상자들은 차분하게 자신들의 수상소감을 말했다. 진솔한 그들의 수상소감에 나도 조금 용기를 얻었다. 몇 번째 앞에서 수상소감을 말하던 대학생 시민기자는 기사를 쓰던 순간의 외로움과 고통이 밀려오는지 나중엔 급기야 울먹이기까지 했는데, 그의 얘기를 듣다 보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나는 그 순간 내가 콘택트렌즈를 착용했다는 사실도 잊은 채 주먹으로 마구 눈물을 훔쳤다. 그러다 단순하게 눈물 때문만은 아닌 답답한 시야를 느끼고 나서야 나는 오른쪽 눈에 착용한 렌즈의 행방이 묘연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급한 김에 옆에 서 있는 최병성 기자님께 도움을 요청했다. 그때부터 최병성 기자님은 내 렌즈를 찾아주겠다고 엎드려서 바닥을 살피기 시작했다.
난 렌즈는 어차피 일회용이라 잃어버려도 괜찮은데 혹시 렌즈가 아직 내 눈동자 한쪽에 걸쳐져 있거나 얼굴 어디에 들러붙어 있는가를 살펴달라며 기자님 앞에 얼굴을 바짝 들이대며 눈동자를 껌벅였다. 정말 민망했다. 기자님은 내 눈을 자세히 살피더니 얼굴 어디에도 렌즈는 보이지 않는다고 말씀하셨다.
적당한 기회를 봐서 사인이라도 한 장 받고 말을 걸어보리라 벼르고 있었던 최병성 기자님이었는데, 잃어버린 렌즈나 찾아달라고 벌겋게 충혈된 눈을 들이밀었으니 나로선 무척 안타까운 상황이었다.
4대강 현장의 눈가림식 교묘한 봉합도, 부실한 공사의 미세한 균열도 예리한 관찰과 끈기로 기어이 찾아내고야 마시는 천하의 최병성 기자님도 끝내 내 렌즈의 행방은 찾아내지 못한 채 내 순서가 되었다. 나는 시야가 흐릿한 불편한 눈으로 마이크를 잡아야 했다.
나는 편한 마음으로 수상 소감을 밝혔다. 그날 행사장에 와서 보고 느꼈던 바를 그냥 솔직하게 말하고 나니 긴장이 풀렸다. 여전히 사물이 두 개로 보이는 불편한 눈 때문에 이내 마이크를 다음 기자님에게 넘기고 나는 곧바로 화장실로 달려갔다.
화장실로 어떤 여자 직원분이 따라오더니 내가 렌즈를 찾는 일을 도와주었다. 당황하지 말고 손으로 살살 눈동자 위쪽을 밀어내리고 눈을 계속 깜박이라고 하더니 어렵잖게 남의 눈에 렌즈를 꺼내주었다. 실종된 렌즈는 다름 아닌 눈동자 뒤쪽으로 넘어가 있었던 것이다.
다시 행사장에 와보니 식순이 끝나고 어떤 기자님이 나에게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직감적으로 강정민 기자라는 걸 알았다. 2월22일상 수상자 인터뷰 기사를 쓰면서 전화와 메일로만 대화를 나눴던 강정민 기자가 행사에 참석한다는 소식을 듣고 나는 무척 기뻤다.
아직 만난 적이 없는 우리는 여럿 가운데서 둘만 알 수 있는 '플래시몹' 같은 것을 정해서 서로를 식별해내자는 재밌는 계획도 세웠는데, 내가 렌즈를 빠뜨리는 소동을 일으키는 바람에 그 계획을 실행해보지도 못한 채 얼떨결에 대면하고 말았다.
"명성 자자한 기자들은 다 소송 한 건씩 걸려 있던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