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원으로 가는 길에 본 차창 밖 풍경
조상연
엊그저께까지 희망이 있다던 장인어른께서 위독하시다는 연락이 왔다. 일산 병원으로 가는 전철 안에서 바라본 차창 밖 풍경.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죽음 앞에서 초연할 수 없다. 내가 언제 죽을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삶이란, 달리는 열차의 뿌연 차창을 통해 보이는, 명확하지 않은 바깥 풍경과 같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빗발로 흐려진 창을 통해 보이는, 우리네 인생은 부평초처럼 목적지도 모른 채 흘러만 가는 것만 같다. 나 죽어 도착할 종착역이 어디인지를 안다면 죽음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 자신이 탄 인생이라는 열차의 출발역과 종착역을 이미 알고 있으니, 도대체 두려울 일이 뭐가 있을까. 공포라는 게 무엇인가? 다음에 벌어질 상황이 예측이 안 되니, 소름이 끼치도록 무서운 것이다.
생에 대해 젊은 사람들은 장담하지 마라예전에 직장생활 할 때의 일이다. 직장 건강 검진을 받았는데, 공교롭게도 두 사람이 똑같이 '암' 진단이 나왔다. 그것도 두 분다 '암 말기'라서 치료가 불가했다. 한 분은 60대 초반, 한 분은 40대 후반이었다. 반년 동안 곁에서 지켜본 두 분의 투병기가 인상적이었다.
40대 후반의 그분은 치료해 봐야 반년을 못 넘긴다고 했으니 진통제나 맞으며 보험금으로 뒤에 남은 식구들 먹고살아 갈 호구지책을 마련하느라 분주했다. 결국은 그 반년 동안 제법 깔끔한 음식점 하나를 마련해 놓고서 생을 마감했다. 지금도 그 자그마한 식당은 성업 중이다.
60대 초반의 또 한 분은 삶에 대한 애착으로 여러 병원에 다니며 모든 검사를 하여 옮겨 다녔다. 병원에서도 손을 놓자, 포천의 어느 기도원에서 치료가 아닌 기도에 의지하다가 결국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객사하고 말았다.
결국, 40대 그분보다 한 달 더 살다가 돌아가셨는데 참으로 비참한 것은 온 집안이 이 분의 병원비로 풍비박산이 난 것이다. 장례를 치를 돈조차 없어 함께 일하던 직원들이 십시일반으로 모아 장례를 치렀다.
나중에 돌아가신 분의 장례식장에서 이러한 사정을 아는 조문객들의 의견이 분분했다. 젊은 친구들은 어차피 죽을 거라면 이렇게 해서는 안 된다. 연세 좀 지긋하신 분들은 나이 들면 생에 대한 집착이 오히려 강해지니 젊은 사람들은 장담하지 마라.
'글쎄? 나라면 어찌했을까?' 내가 비슷한 경우를 한 번은 겪어 봤다고는 하나, 죽음이란 결코 경험하고 싶지 않은 것임은 틀림이 없다.
산소호흡기로 연명하는 삶,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