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장의금부 나장들이 쓰던 모자
이정근
잠시 후, 이개가 포승줄에 묶여 왔다. 머리는 산발한 채 피투성이가 되어 축 늘어진 성삼문을 발견한 이개는 아연실색했다.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간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너는 나의 옛 친구다. 친구 사이에 이럴 수 있느냐?""나는 친구로 대해준 적이 없소이다.""허허."수양이 허허로운 웃음을 날렸다.
"좋다. 네가 날 친구로 대하지 않아도 너는 나의 옛 친구다. 참으로 그러한 일이 있었다면 모조리 말하라""말할 것이 없습니다.""정말이냐?""그렇소이다."이개가 완강히 버텼다. 문과에 급제하여 조정에 출사한 이개의 문재(文才)를 일찍이 간파한 세종은 그를 저작랑(著作郞)에 임명하여 명황계감(明皇戒鑑)을 편찬케 하고 훈민정음 창제에 참여시켰다.
집현전 학사들이 한글 창제에 여념이 없을 때, 수양은 집현전을 방문하여 구경하는 것을 좋아했다. 이때 수양의 눈에든 게 이개였고. 수양은 동갑내기인 그를 벗처럼 대했으나 이개는 대군으로 깍듯이 예우했다. 야심 많은 수양에게 붕우(朋友)의 정을 섞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수양이 하위지에게 시선을 돌렸다.
"성삼문과 무슨 일을 의논하였느냐?""기억이 없습니다.""기억이 없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구나. 누구누구와 모의했느냐?""기억이 안 납니다.""네 눈에는 내가 누구로 보이느냐?""보이는 게 없습니다."완전 무시로 나갔다. 수양이 눈을 부릅뜨면 하위지도 눈을 부릅떴다. 하위지는 상왕파 중에서 제일 연장자다. 성삼문보다 여섯 살 위고 수양보다도 다설 살 위다. 품계는 나이의 상위개념이다. 더구나 군신관계에서는 의미가 없다. 하지만 하위지는 중후한 몸짓으로 분위기를 압도했다.
"너의 임금은 누구냐?""딱 한 분입니다.""그가 누구냐고 묻지를 않느냐?""여기 계시지 않은 것은 분명합니다.""이런 고얀 놈 같으니라고. 이놈을 당장…."개무시를 당한 수양의 인내심이 한계에 이르렀다. '당장 끌어내어 목을 쳐라'고 명하고 싶었다.
권력에 빌붙어 야심을 이루려는 자 누구인가?"한방이 엮어놓은 고구마 줄기를 서서히 당겨야 합니다. 너무 조급하게 서두르면 줄기를 놓칠 수 있습니다. 지난 번 김종서와 황보인을 제거할 때처럼 빨리 죽여서는 안 됩니다. 시간은 우리 편입니다. 체신을 지키며 천천히 가야 합니다. 이번엔 복위 음모에 연루된 자들뿐만 아니라 상왕도 쓸어 내야 합니다."어젯밤, 확대 참모회의에서 나직이 속삭이던 귀엣말이 생각났다. 달콤한 목소리였다. 권력이 커지면 욕심을 내는 자가 있게 마련이다. 임금의 국구가 되려는 자의 야심은 하늘 높은 줄 모르게 커졌다. 수양이 자세를 고쳐 앉았다.
"이 무리들은 즉시 엄한 형벌을 가하여 국문함이 마땅하나 유사가 있으니 이들을 의금부에 하옥하라."피투성이가 된 성삼문이 다리를 끌며 끌려 나가고 하위지와 이개가 그 뒤를 따랐다. 이때였다. 공조참의 이휘가 헐레벌떡 뛰어 들어와 넙죽 엎드렸다.
"신이 성삼문의 집에 갔더니 권자신, 박팽년, 이개, 하위지, 유성원이 모여서 의논을 하고 있었습니다. 성삼문이 '자네는 시사를 알고 있는가?' 하기에 '내가 어찌 알겠나?' 하였더니 성삼문이 '지금 상왕을 모실 궁리를 하고 있네' 하였습니다. 신이 '그 의논을 아는 사람이 몇 사람이나 되는가?' 하였더니 '박중림과 박쟁도 알고 있다' 하였습니다. 신이 즉시 아뢰고자 하였으나 내막을 정확히 알지 못하였기 때문에 즉시 아뢰지 못하였습니다."착한 이휘다. 스스로 알아서 기었으니 하나밖에 없는 생명에 충실한 위인이다. 허나 자비는 없었다. 비겁한 자의 특권은 거두어지지 않았다. 그는 결국 거열형을 당하고 말았다. 수양 즉위에 협조한 공으로 좌익공신 3등에 책록되고 또 다시 그의 손에 죽임을 당했으니 권력무상, 인생무상이다.
"박팽년을 잡아들이고 국청을 준비하라."본격적인 신문(訊問)을 하겠다는 것이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그동안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을 펴냈다.
기사를 스크랩했습니다.
스크랩 페이지로 이동 하시겠습니까?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