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계부와 통장 그리고 각종 생활비 영수증
최유진
물질적 풍요의 시대를 사는 자녀들에게 지금 가장 필요한 경제 교육은 '당장 해버리지 않고, 모아서 하는 경제 구조'를 갖도록 독려하는 일이다. '당장 해버리는 습관'은 스스로 감당키 어려운 부채의 늪에 빠지게 될 우려가 크다. 물질 부족의 시대보다 경제 교육적 여건은 더욱 악화된 셈이다. 이에 특별한 경제 교육보다는 가정에서의 일상적 경제 활동의 흐름을 아는 것이 훨씬 효과적이다. '가계부'를 온 가족이 함께 쓰는 것은 핵심 가치가 될 만하다.
우리 가정의 수입과 지출 내역을 자녀들과 공유하는 것은 어떤 효과가 있을까. "아이들이 너무 빡빡한 가정 살림을 보게 되면 오히려 위축되지는 않을까요?" "일찍부터 숫자들을 접하게 되면 너무 돈돈거리는 아이로 자라지 않을까요?" 물론 그럴 수 있다. 그러나 여러 상담 결과를 통해 보게 되면 오히려 어른들이 융통성이라는 미명하에 왜곡된 경제적 데이터를 만들지만, 아이들은 매우 정확한 기준을 갖는다.
매월 마이너스가 발생하는데 가계부는 적어 무엇하냐며 던져 버리는 것은 어른들이다. 왜 마이너스가 나는지, 도대체 어디에 얼마를 쓰고 사는지 궁금해 하는 것이 아이들이다. 마이너스 가계 구조는 직면하기에 불편하지만, 어쨌건 제대로 파악해야 '마이너스'가 나지 않을 방법을 찾을 수 있지 않겠는가.
2년 전, 초등학생 대상 어린이 경제 교육을 하면서 '돈에 관해 부모님께 가장 하고 싶은 말'을 적는 시간을 가져본 적이 있었다. '용돈 올려주세요' '돈 때문에 싸우지들 마세요''성적 오르면 돈 주겠다던 약속 지키세요' 등등 다양한 의견들이 많았다.
그렇다면 가장 많은 아이들이 써낸 말은 무엇이었을까. '제 세뱃돈 어딨어요'가 단연 1위였다. 아이들은 자신의 세뱃돈의 거취(?)에 대해 이런저런 의혹들을 앞다퉈 제기하기에 바빴다. 항상 가져가놓고 돌려주지 않는다는 불만을 토로하면서 정작 뭔가 사고 싶은 걸 사달라고 하면 '돈 없다'고 반응하는 것이 부당하다고 했다. 아이들 입장에서 나름 목돈을 받는 흔치 않는 기회인지라 기억이 더욱 강렬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한 남자 어린이는 큰 소리로 엄마 험담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우리 엄마는 절 되게 미워해요. 용돈을 받은 적도 없고, 뭐 필요하다고 이야기만 하면 '왜 그렇게 돈돈하느냐'며 막 야단만 쳐요. 저한테만 맨날 돈 없다고 하는데 우리 집에 돈 없지 않아요." "돈이 있는데도 설마 그러시겠니. 뭐든 해 주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같은데, 막상 돈이 없으면 엄마 마음이 아파서 그러시는 걸거야.""아뇨! 엄마는 항상 TV보면서 막 물건 사요! 맨날 저한테만 돈 없다고 그러는 거라니까요."아이들의 세뱃돈은 어디로 갔을까나중에 교육 내용을 부모님들께 알려 드리자 웃기도 하고 황망해했다. 부모님들 입장에선 기가 찰 노릇이다. 적지 않은 돈이 늘상 자녀들 입히고 먹이고 가르치는 데 들어가는 걸 생각하면 적반하장도 유분수다. 물론 세뱃돈이나 기타 아이에게 들어오는 각종 명목의 '용돈'을 꼬박꼬박 아이 이름으로 모으는 부모님들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많지도 않은 돈 따로따로 관리할 만큼 꼼꼼하게 돈 관리하는 집이 몇 집이나 될까.
"다 지들한테 쓰여졌겠지. 설마 그 돈을 뭐 따로 날 위해 썼겠어요?" 물론 어디로 없어진 게 아닌 이상 '살림살이'에 쓰여졌을 것이다. 불신과 오해는 비단 세뱃돈만이 아니다. 남편들도 뭔가 돈이 필요한 시점에 "그동안 벌어다 준 돈 다 어디로 간거야?"라는 볼멘 소리를 주워 섬기기 일쑤고, 살림을 도맡은 가정주부는 머리카락이 곤두선다.
"더럽고 치사해서 나도 돈 벌어야겠어요. 누가 나 좋자고 살림만 하고 있는 줄 아나."돈이 얼마가 들어와서 어디에 어떻게 쓰이는지 현황을 기록한 장부가 있다면 이 상황에서 대화가 훨씬 수월해지지 않을까. 소비 예산를 짜보면 알겠지만 어느 항목 하나 마땅히 줄이기가 어렵다. 소소한 하나하나의 지출이 모여 제법 큰돈이 되고, 아무것도 아닌 것만 같은 일상생활 자체를 유지하는데도 기본적으로 꽤 큰돈이 든다.
먹는 걸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정은 그 어떤 항목보다 식비 예산이 많이 들고, 가족 간의 교류와 친목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정은 '가족 관련 예산'이 많이 필요할 것이다. 문화 생활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정은 상대적으로 '문화예술비' 예산이 클 것이고, 여행 다니는 걸 좋아하는 가정은 '여행 레저비' 예산을 높게 책정할 것이다.
문제는 이 모든 것을 골고루 다 누릴 수는 없다는 데 있다. 소득이 정해져 있으므로, 어느 한 항목에 집중하게 되면 다른 항목의 예산들은 줄어들게 마련이다. 이런 유기적 상관관계를 이해하고 서로 의논하는 가정환경에서 자란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몸으로 경제관념을 익히게 된다.
김진욱씨(가명·기혼·45) 가정에서는 주된 지출 항목별로 소비 예산을 아래와 같이 짜서 한쪽 벽에 붙여 둔다. 소비 예산은 지난해 지출 내역을 근거로 작성한 것이므로 올해 지출의 좋은 기준이 된다. 정해진 예산에 맞게 지출하는 습관을 키우기 위해 매월 가계부는 해당 항목별로 결산한다. 물론 예산에 반영되지 않은 긴급한 지출이 발생될 수도 있다. 그럴 때는 자유입출금 통장에 넣어둔 비상자금으로 충당하고, 다시 열심히 쓰여진 금액만큼을 채운다. 긴급하지는 않아도 예산 세울 때 미처 생각지 못한 지출은 어떻게 해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