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 방문시 애국열사릉에서.
이길상
내선일체 교육에 대한 조선 학생과 일반 교육자들의 지지를 이끌어 내기 위한 식민지 지식인을 대상으로 한 동의 창출과정이었다. 여기에 동원된 인사는 김활란(이화전문 부교장), 윤일선(세브란스의학전문 교두), 이춘호(연희전문 학감), 조동식(동덕고등여학교 교장), 그리고 이만규(배화고등여학교 학감) 등 조선인 교육자 12명이었다. 대부분이 이미 1920년대 후반부터 일제의 식민지 교육정책에 적극 동조하던 인물들이다.
이 좌담회에서 이만규는 일제의 내선일체 방침에 따른 학교명칭 통일, 일본학생들과 조선학생들이 함께 공부하는 내선공학, 일본교과서의 전면적 사용, 교과서에 대한 총독부 검정제도 등 모든 내선일체 교육정책에 대해 지지를 표시하였다. 이만규는 이미 1938년 2월 25일자 <조선일보>에 실린 '개정교육령 지상좌담회'와 3월 17일자 기고문을 통해서도 내선일체와 황민화를 위한 수신교육의 강화, 특히 개인주의 중심에서 국가주의 중심으로의 수신교육의 방향 전환에 대해서도 지지를 한 바 있었다.
좌담회에서의 발언 내용 뿐 아니라 좌담회 참석 자체도 문제다. 좌담회가 개최된 날짜가 1938년 5월 2일이다. 흥업구락부사건으로 이만규를 비롯하여 50여 명의 민족주의자들에 대한 경찰의 조사활동이 시작된 지 2개월이 경과한 시점에서 총독부 기관지가 주최하는 좌담회에 참석하여 친일 경향의 교육자들과 함께 일제의 교육정책에 대한 지지를 표명하였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점이다.
이만규는 이미 흥업구락부와 관련된 총독부의 혐의에서 벗어나 있었거나 아니면 총독부와의 화해를 도모하기 위해서 좌담회에 참석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지금까지 알려져 왔던 대로 6개월간 옥고를 치렀다는 것은 사실일 수 없다.
이만규를 포함한 흥업구락부 관련자 54명 전원은 1938년 9월 3일자로 공개적으로 전향성명서를 발표하여 기소유예 처분을 받았다. 전향성명서에서 이들은 "내선일체의 사명을 구현시키는 것이 조선민중의 유일한 진로인 것을 인식하여 신일본 건설의 대국민적 긍지와 포부 하에 그 주어진 바의 임무를 수행하는 것이 조선민중의 장래의 행복과 발전을 약속하는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이 성명서에서 이들은 일본을 "아일본(我日本)"으로 표현하였고, 활동자금으로 모았던 2400원을 국방비로 헌납했다. 이후에도 매월 10원 씩 국방헌금을 바치겠다는 약속까지 하였다.
흥업구락부 사건 후 이만규의 행적과 관련하여 흥미로운 것은 1939년 2월 10일 개최된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YMCA) 제36회 정기총회에서 새로 선임된 4명의 이사 중 1명에 포함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날 함께 이사로 선임된 인물은 김종우, 양주삼, 그리고 원한경이었다. 김종우와 양주삼은 1938년 12월에 한국의 기독교를 대표하여 일본에 건너가 신사참배를 시작하는 등 황민화 정책에 호응하여 적극적으로 친일 행위를 했던 대표적인 기독교계 인사였다.
당시 연희전문학교의 교장으로 있던 원한경(Horace Horton Underwood)은 선교사의 아들로서 기독교의 신사참배를 지지하던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이들과 함께 이만규는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의 신임 이사로 선임되었던 것이다. 당시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는 대표적 친일 기독교도인 신흥우가 총무로, 윤치호가 부총무로 있던 친일 종교단체였다.
태평양전쟁 발발 직후인 1942년 2월 3일 이만규는 경성방송국의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하여 '전시가정시간 <질서 있는 생활을 합시다>'라는 연설을 하기도 하였다. 내용을 확인할 수는 없으나 가정교육 전문가로서 전시에 즈음하여 일반국민들이 생활 속에서 준수해야 할 지침을 전달한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여학생용 부교재 '가정독본', 조선총독부 발표한 '의례준칙' 준수 주장이만규는 1941년에 여학생용 부교재 '가정독본'을 간행하였다. 이 책에서 그는 놀랍게도 조선총독부가 1934년에 발표한 '의례준칙'의 긍정적 영향을 인정하고 그것의 철저한 준수를 주장하고 있다. '가정독본'의 내용 중 의례개혁 부분은 '의례준칙'의 복사물이었다. 당시 총독부 '의례준칙'의 준수는 일제의 가정보국운동의 핵심이었다는 점에서 보면 그의 '가정독본'은 친일의 흔적임이 틀림없다.
1942년 10월 1일부터 일제는 이만규를 비롯한 조선어학회 핵심인사 33명을 순차로 검거하였다. 이만규는 초기 기소대상자 16명에 포함되어 있었으나 담당 검사에 의해 기소유예 처분을 받아 수감을 면할 수 있었다. 기소유예 사유는 분명치 않다. 조선어학회의 핵심 간부로서 활동 내용이 결코 가볍지 않았음에도 기소를 당하지 않았던 것을 보면 이만규가 교육부문에서 기왕에 보였던 타협적 활동이 그의 기소유예를 가능하게 하였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조선어학회에서 이만규에 비해 활동이 두드러지지 않았던 인사들 다수가 기소, 재판, 복역, 혹은 옥중사망의 길을 걸었던 것과 대비된다. 이 사건 이후에도 그가 배화여고에서 교두로서 활동을 지속한 것 또한 당시 총독부와 이만규와의 관계가 대립이나 투쟁의 상태가 아니었음을 말해준다.
이만규는 해방 직후에 쓴 '조선교육사'에서 민족적 양심을 지녔지만 시대적 상황으로 인해 이를 지켜내지 못했던 교육자를 가장 불행한 생활을 한 것으로 묘사하였다. "가면을 쓰고 이중생활을 하지 않으면 교단에 설 수가 없었"던 식민지 지배하의 조선인 교육자들의 양심의 고통을 타자화하여 말하고 있지만 이상에서의 이만규의 삶을 고려해보면 민족적 양심은 지녔지만 시대적 상황으로 인해 끝까지 이를 지켜낼 수 없었던 자신에 대한 이야기와 다름없다. 식민지 후반 시기를 이만규는 교육파멸기라고 불렀지만 이 시기는 교육만이 파멸된 것이 아니라 교육자인 이만규 자신도 파멸을 경험한 시기였다.
덧붙이는 글 | 이길상 기자는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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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인문학자이며 교육학 교수이다. 유투브채널 <커피히스토리>를 운영하고있다. 대표적인 저서로 <커피가 묻고 역사가 답하다>(2023), <커피세계사 + 한국가배사>(2021), <한국교육 제4의 길을 찾다>(2019), <세계의 교과서 한국을 말하다>, <글로벌 시대의 다문화교육>(2015), <20세기 한국교육사>(2007)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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