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강 최대교 검사전주 덕진공원에 있는 최대교 검사 동상
정운현
약 30분 동안 현장검증을 마친 후 그는 곧바로 권승렬 장관과 함께 이범석 국무총리를 찾아갔습니다. 마침 이 총리는 사냥을 나가고 없었습니다. 그러자 그는 바로 공덕동에 있는 신성모 국방장관을 찾아갔는데, 신 장관은 백범 서거 소식을 듣고는 "이제 민주주의가 됐군!"이라며 뜻 모를 말 한마디를 던졌다고 합니다.
문제는 용의자에 대한 영장청구. 당연히 담당 검사장인 그의 몫이었는데 뜻밖에도 김익진 검찰총장이 직접 영장청구를 하자 그는 김 총장을 찾아가 따졌습니다. 그러자 김 총장은 몹시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손가락으로 경무대 쪽을 가리키며 "저 영감태기(이승만)가 노망이 들었지…, 저 영감이 최 검사장한테는 일체 비밀로 하라고 해서 그리된 거요. 양해해 주시오"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즉각 사표를 제출했으나 권 장관이 집까지 찾아와 반려했습니다.
그러나 한 달여 뒤인 1949년 9월, 그는 결국 사표를 쓰고 검찰을 떠나게 됐습니다. 발단은 당시 '이승만의 양녀'로 불린 임영신 상공부 장관의 독직사건(사기 및 수뢰혐의)을 기소한 것 때문이었습니다. 그해 4월 초 감찰위원회는 임 장관에 대해 업무상 횡령·사기·수회 등 혐의사실을 잡고, 파면 결의와 함께 검찰에 고발했습니다.
그는 즉시 강석복 검사에게 수사 지시를 내렸는데, 수사 과정에서 임 장관이 경북 안동 보궐선거에 출마하면서 상공부 직할 적산 메리야스 공장 관리인으로부터 270만 원의 뇌물을 받은 사실 등을 밝혀냈습니다. 이에 대해 임 장관은 "선거사무장이던 여동생(임영선)이 이 돈을 받아 선거비용으로 쓴 것"이라면서 자신은 무관하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자 그는 증거 인멸을 우려해 임영선을 구속했습니다.
동생이 구속되자 임영신 장관은 여동생의 세 살짜리 어린애를 안고 경무대로 달려가 이승만 대통령에게 동생의 석방을 호소했습니다. 결국 이승만은 이인 법무장관을 불러 석방을 지시하고 이인은 다시 권승렬 검찰총장에게, 권 총장은 다시 그에게 임영선을 석방하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러자 그는 "기소 불기소 결정은 검사의 전속권한이고 형사소송법에 규정돼 있다. 법무부장관이 검사의 구체적 사건의 기소, 불기소에 관여하는 것은 불가한 것으로 생각되니 재고하라"며 이 장관의 요구를 뿌리치고 임 장관을 전격 기소했습니다. 이 일로 이 대통령의 미움을 산 그는 결국 얼마 뒤 옷을 벗어야 했습니다. 그는 법과 양심에 비춰 옳다고 생각하는 일에는 소신을 굽히지 않았으며, 불의와 타협하지도 않았습니다.
그가 정치권력에 당당히 맞설 수 있었던 힘의 원천은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청렴한 생활과 그에 바탕을 둔 올곧은 기개였습니다. 서울지검장 시절 그의 월급은 1만7000원, 당시 쌀 한 가마 정도를 살 수 있는 돈이었습니다. 그의 봉급만으로는 가계를 꾸려 나가기가 어렵게 되자 그의 아내는 몰래 봉투를 만들어 내다팔기도 했습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도시락을 쌀 형편이 못돼 점심시간에 누룽지를 밥 대신 먹다가 출입기자들에게 들켜(?) '누룽지 검사'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습니다. 4·19 혁명 후 10년 만에 서울고검장으로 검찰에 복귀한 그는 당시 학생들이 당시 기름 한 방울 나오지 않는 나라에 관용차가 너무 많다고 시위를 벌이자 '백 번 옳다'며 그날로 서울고검장 차를 없애버렸습니다. 그러고는 이튿날부터 아현동 집에서 서소문 검찰청까지 걸어 다녔습니다.
가장 본받을 만한 청백리 법조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