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책감'... 왠지 망가져야 할 것 같아서

[연재소설 하얀여우- 마지막회] 우린 모두 하얀 여우에...

등록 2012.01.31 18:13수정 2012.01.31 1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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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하지 않고 1년 정도 술만 마시며 살았다. 완전히 빈털터리가 됐다. 주머니도 텅 비었고 몸도 마음도 텅 비어 버렸다. 술을 마시면 고윤희 체취가 그리워 견딜 수 없었고 술 기운이 떨어지면 우울해 져서 견딜 수 없었다.

인호에 대한 죄책감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왠지 망가져야 할 것 같았다. 반듯하게 살면 인호가 싫어 할 것 같았다. 그렇게 난 서서히 망가져 갔다.


의지 할 곳이 없었다. 피 붙이와 친구들이 모두 가까운 곳에 살고 있었지만 언젠가 부터는 생면부지 남보다도 못한 관계가 돼 버렸다. 다단계에 빠져 있던 8개월, 그 후 폐인처럼 살아온 1년 동안에 거의 모든 인간관계가 무너져 버렸다.

형과 누나는 내 빚을 대신 갚아주느라 허덕이고 있었다. 카드 돌려 막기를 하다 보니 카드빚이 눈 덩이처럼 커졌다. 도저히 갚을 수 없다고 하자 은행 대부계 직원은 대환 대출을 권했다. 대환 대출을 하려면 보증인이 필요 했다. 그 보증을 형과 누나가 서 줬다. 

친구들 사이에선 위험인물로 찍혀 있었다. 다단계에 배꼽친구를 끌어 들였다는 원죄가 있었고 돈을 빌려주면 갚지 않는다는 소문이 이미 파다하게 펴져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내게 오던 전화는 거의 대부분이 빚 독촉 이었다. 빚 독촉 하는 방법은 은행이나 친구나 비슷했다. 처음엔 어느 정도 예의를 지키다가 그 다음엔 위협을 하고 결국엔 악다구니를 썼다.     

피 붙이는 좀 달랐다. 위협을 하거나 악다구니를 쓰지 않았다. 그래서 더 마음이 아팠다. 1년에 두 번, 추석과 설은 가족들이 의무적으로 모여야 하는 날이다. 난 이때가 가장 힘들었다. 형과 누나 얼굴 보기가 너무 힘겨웠다. 그래서 명절이 오기 전 세상이 끝났으면 좋겠다는 어리석은 상상을 하곤 했다.    


이러한 현실이 주는 고통을 난 이겨내지 못했다. 당당히 맞서 싸워야 했지만 그러질 못했다. 어리석게도 난 도피처를 찾고 있었다. 떠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를 알아보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곳으로. 특히 가을만 되면 견딜 수 없었다. 노란 은행잎이 길 바닥에서 뒹구는 모습만 보면 최면에 걸린 듯 어디론가 떠나고 싶어 견딜 수 없었다.

97년 가을, 노란 은행잎을 밟으며 난 서울을 떠났다. 어디론가 가서 그동안 일을 훌훌 털어 버리고 다시 돌아올 계획으로 목적지도 정하지 않은 채 경부선 열차에 몸을 실었다. 이때는 알지 못했다. 내 방황이 그렇게 길 줄을.


난 떠났다 돌아오기를 반복했다. 떠날 때도, 돌아 올 때도 대부분 가을 이었다. 어디론가 떠날 때 느끼는 한갓진 기분은 마약과 같았다. 가방을 들고 기차에 오를 때만이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농촌이나 어촌에는 일자리가 많았다. 아직 젊다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꽤 많은 돈을 주었다. 한 달 일하면 세 달 여행할 경비가 생겼다. 어디에선가 세 달만 일하면 일 년 동안 떠돌아다닐 수 있었다. 그렇게 13년을 떠돌았다.

이제 내 나이 마흔 셋, 방랑도 끝났고 인생도 끝났다. 약해 질대로 약해진 몸이 더 이상의 방랑을 허락하지 않았다.

병실 창문 너머에 있는 건물들이 가끔 안개가 자욱하게 낀 듯 뿌옇게 보인다. 그러다가는 정신이 아득해 지고 혼이 어디론가 빠져 나가 버린 듯한 느낌이 든다. 그 다음엔 꿈을 꾼다. 깨어나 보면 늘 병실 침대다. 간신히 눈을 뜨면 간호사는 손가락을 펴 보이고는 몇 개냐고 묻는다. 

가끔은 간호사 손가락이 제대로 보이지 않을 때도 있다. 그럴 때 마다 난 "편 손가락 을 말하는 겁니까, 아니면 접은 손가락을 말하는 겁니까?" 하고 우스갯소리를 한다. 그러면 간호사는 안심하고 돌아간다. 

만약 인호를 만난 다면 무슨 말을 할까 가끔 생각한다. 구해주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해야 하나! 그냥 웃어줄까! 둘 다 어쩐지 어색하다.

인호와 나 둘 다 하얀 여우에게 홀린 것이라 생각한다. 하얀 여우에게 홀려 구렁텅이에 빠진 것이다. 난 인호를 구해 주었어야 했다. 그런데 미련스럽게도 함께 빠져서 허우적거리다  함께 망가진 것이다.

한때는 고윤희가 하얀여우 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고윤희가 남편과 이혼하고 딸 둘을 힘들게 키운다는 소식을 듣고 난 이후 생각이 바뀌었다. 어쩌면 고윤희도 나와 인호처럼 하얀여우에게 홀린 인생 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 말대로 눈이 많이 온 날엔 밖에 나가지 말았어야 했다. 밖에 나가지 않았으면 하얀여우 에게 홀릴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 사실을 너무 늦게 깨달은 것이다.

눈 덮인 세상 속에 무엇이 있을까 궁금했다. 눈 속을 파보면 굉장한 것이 숨어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속엔 욕망으로 뭉쳐진 도시만, 욕망으로 뭉쳐진 사람들만 있었다. 나도 인호도 고윤희도 욕망으로 뭉쳐진 사람들 중 하나였을 뿐이다.
#하얀여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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