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복궁 강녕전 임금의 침소이다
이정근
인왕산에 걸쳐 있던 태양이 사라지고 땅거미가 내려앉은 어스름 밤. 숙부 수양에게 왕위를 물려준 상왕이 강녕전을 나섰다. 방을 빼라고 다그치진 않지만 새로운 왕이 세워졌으니 임금의 전용 침소 강녕전을 비워주어야 한다.
불도 밝히지 않은 어두운 경복궁. 달빛에 의지하여 수강궁으로 향하는 상왕을 발견한 궁인들이 행랑에 몰려나와 통곡했다. 멀어져가는 상왕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박팽년이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어린 임금 하나 지켜주지 못한 우리가 죄인이야.""절제대감을 죽일 때부터 그의 흑심을 알아봐야 했는데, 믿었던 우리가 바보일세."집현전 학사를 비롯한 조정의 젊은 관료들은 수양이 김종서를 격살할 때까지만 해도 그의 의중을 반신반의했다. 인사는 이조(吏曹)의 고유권한이다. 임금이 관직을 제수할 때 그들이 세 사람의 명단을 올리면 임금이 한 명을 낙점했다. 6조 중 수석관서이기 때문에 천관(天官)이라 불리며 그 소속 관원들은 전관(銓官)이라 불렸다. 그만큼 그들의 권한은 막강했다.
헌데, 이조에서 올린 명단에 김종서와 황보인이 노란 표를 해서 올리고 임금은 그대로 낙점했다. 정의와 혈기가 살아 있는 젊은 관료들은 이러한 인사행정을 이해할 수 없다고 성토했다. 분노한 그들은 황표정사를 매관매직의 뿌리가 되는 망국적 행위로 규정했다
"수양도 분경의 폐해에서 자유로울 수 없지만 황표정사로 국정을 농단하는 훈구대신들은 마땅히 제거해야 할 공적이다.""수양의 초법적 조치는 과격했으나 추이를 지켜보자."대체로 그러한 정서였다. 그 기류의 중심에 신숙주가 있었다. 허나, 수양이 조카의 왕위를 찬탈하자 권력에 빌붙어 출세지향으로 나가려는 자와 왕권회복을 위하여 목숨을 걸겠다는 절의파로 극명하게 갈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