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석정 터. 경북 경주시 배동 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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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훤의 방식이 오류였다는 것은 금방 드러났다. 견훤은 허수아비 임금인 경순왕을 세우고 신라를 계속 압박했지만, 이것은 역효과만 낳았다. 신라가 고려에 급격히 기우는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930년부터 신라와 고려는 급속히 가까워졌고, 급기야 정상회담 논의까지 주고받는 관계가 됐다.
이렇게 해서, 견훤의 경주 방문 4년 뒤인 931년에 왕건의 경주 방문이 성사됐다. 경순왕의 초청을 왕건이 수락하는 형식으로 정상회담이 이뤄진 것.
과거 동아시아의 정상회담은, 입장이 불리한 쪽이 유리한 쪽을 찾아가는 방식으로 이뤄졌다. 입장이 불리한 쪽은 제후의 자격으로 입장이 유리한 쪽을 방문했다. 이것을 친조(親朝)라 했다. '직접 알현하다'란 의미다.
고조선 시대의 중국 역사를 다룬 <서경> '우서'편에서는 "(천자는) 5년에 한 번씩 (제후를) 순방한다"고 기록돼 있지만, 이는 중국 내부에 국한된 일이었다. 국제관계에서는 이런 원칙이 적용되지 않았다. 천자국 즉 황제국 군주가 제후국 군주를 방문하는 것은 동아시아인들의 관념으로는 납득하기 힘든 일이었다. 점령을 목적으로 방문하는 경우라면 몰라도, 평화적으로 방문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렇게 강대국 군주가 약소국 군주를 방문하지 않는 것이 관례였는데도, 왕건은 직접 경주를 방문했다. 당시는 신라의 권위가 떨어질 대로 떨어진 뒤라 신라왕의 체면을 세워줄 필요가 없었는데도, 왕건은 스스로를 굽히면서 신라와의 정상 외교에 성의를 다했다.
신라인과 함께 눈물 흘린 왕건
음력으로 신라 경순왕 5년 2월 즉 양력 931년 2월 20일에서 3월 21일 사이에, 50여 명의 호위병을 데리고 경주 외곽에 도착한 고려왕 왕건은 여기서부터 예의를 갖췄다. 견훤 같았으면 그냥 왕궁으로 직행했을 것. 하지만 왕건은 경주 외곽에서 잠시 대기하면서 경순왕에게 '뵙기를 청한다'는 전갈을 보냈다.
이후 왕건의 태도는 계속해서 신라 사람들을 감동시켰다. 별궁 내부의 건물인 임해전에서 열린 환영연에서 경순왕이 견훤의 횡포에 분노하며 울음을 터뜨리자, 왕건은 공감을 표시하며 함께 눈물을 흘려줬다.
뿐만 아니라 50여 명의 호위병들은 수십 일 동안 경주에 체류하는 동안 신라 백성들에게 조금도 민폐를 끼치지 않았다. 후백제 병사들이 견훤의 지휘 하에 집단강간을 자행한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왕건은 신라인들에게 좋은 인상을 심어주고자 호위병들에게 사전에 단단히 주의를 줬던 것이다.
정상회담의 결과로 신라의 입장이 한층 더 불리해졌다는 점은, 왕건이 귀국하던 날의 풍경에서 잘 드러난다. '신라 본기'에 따르면, 왕건이 귀환할 때 함께 길을 떠난 신라인이 있었다고 한다. 경순왕의 사촌아우인 유렴이 인질이 돼 왕건을 따라나섰던 것이다. 이는 왕건이 정상회담을 통해 신라를 자기 밑에 뒀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장면이었다.
이렇게 왕건이 경주 방문을 통해 국익을 챙겨 돌아가는데도, 신라 여론은 왕건에 대해 우호적이기만 했다. 경주 사람들은 "지난번에 견씨가 왔을 때는 꼭 승냥이나 여우를 만난 것 같더니만, 이번에 왕공이 올 때는 꼭 아버지나 어머니를 뵙는 것 같다"고들 말했단다. 상대방을 존중하고 예의를 다하는 왕건의 태도가 신라인들에게 신뢰감을 심어줬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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