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여자가 결혼하는 날

[연재소설 - 하얀여우13] 인호의 복수

등록 2012.01.20 16:43수정 2012.01.20 1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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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겨울이 지나고 봄이 왔다. 그 해 봄에 충격적인 소식 두 가지가 날 기다리고 있었다. 한 가지는 이미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기에 견딜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다음에 날아온 소식은 견디기 어려웠다.

처음 들려온 것은 고윤희가 결혼 한다는 소식이었다. 5월이었다. 난 하객으로 참석했다. 축하해 주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치기였다. 고윤희 따위는 이제 내 맘속에 없다는 사실을 보여 주고 싶었다.


웨딩드레스를 입은 고윤희는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웠다. 그 모습을 보고 하객으로 참석한 것을 후회하고 말았다. 보지 말았어야 했다. 고윤희는 내 마음 한구석을 여전히 점령하고 있었다. 인호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고윤희가 결혼식을 올린 다음 날, 인호가 아파트 옥상에서 뛰어 내렸다는 소식이 들렸다. 다단계 교육을 같이 받은 군대 후임병 김진수가 흥분된 목소리로 내게 그 사실을 알렸다. 고윤희가 결혼식을 올린 날 밤에 인호는 아파트 옥상에서 뛰어내린 것이다.

믿을 수가 없었다. 견디기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을 것이란 생각에 걱정은 했지만 자살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나도 잘 버티고 있는데 인호가 그럴 줄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인호는 나보다 한 살 어렸지만 때론 형 같은 기분이 드는 믿음직한 친구였다. 어디를 가든 잘 적응 할 것 같은 둥글둥글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군대 생활에 적응하지 못해 애를 먹는 나를 늘 도와 준 것이 인호였다.

문상객이 없는 장례식장은 쓸쓸함 그 자체였다. 인호 어머니와 누나만 영정 앞에 넋이 나간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인호 아버지는 인호가 어렸을 때 돌아가셨다. 인호 어머니는 나와 김진수를 보자마자 참았던 눈물을 터뜨렸다.


"아침에 구급차 소리가 들리고 사람들이 웅성거려서 밖에 나가보니 세상에 인호가 피투성이가 돼서 바닥에 쓰러져 있는 거야, 보고 있는데도 믿을 수가 없었어."
"혹시 유언 같은 거 남기지 않았어요?"
"그런 거 없어. 도대체 얘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어. 그 피라미든가 뭔가 그만두고 돈 때문에 시달리기는 했지만."
"돈 달라는 사람 많았나요?"
"몇 명 있었어, 카드 회사에서도 전화 많이 오고, 여기저기서 많이 빌려 썼나 봐, 그 중에 친척들 돈도 꽤 있고, 그것 때문에 괴로워 한 것 같아, 얘가 원래 마음이 약하거든, 요즘 술을 부쩍 많이 마시는 것 같았어, 그날 도 나하고 좀 다퉜어, 나가서 막노동이라도 하라고 내가 좀 볶았지, 젊은 녀석이 허구한 날 방구석에 틀어 박혀서 술만 마셔대니 살 수가 있어야지."

인호 어머니와 누나는 고윤희와 인호 그리고 나 사이에 있었던 일을 모르는 듯 했다. 고윤희 친구인 인호 누나는 어렴풋이나마 알고 있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았다.


"상범씨 한테도 아무 얘기 없었어요? 회사에서 혹시 무슨 일 있었나요?"
"글세요. 별다른 일은 없었어요. 우리 둘 다 몇 달 전부터 사무실엔 나가지 않았고요."
"그 피라미든가 뭔가가 문제였어요. 내 친구 윤희 알죠? 어제 결혼 한 애요. 그 애 소개로 하게 됐는데 이렇게 될 줄 누가 알았겠어요. 나라도 진즉에 말렸어야 했는데. 윤희 그 애는 잘 하는 것 같은데 어째서 우리 인호만 이렇게 많은 빚을 지게 됐는지 모르겠어요."

더 이상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인호도 나와 같은 일로 괴로워하고 있었던 것이다. 고윤희에 대한 그리움과 배신감 그리고 경제적 압박. 고윤희 결혼식 날 자살한 것은 일종의 보복일 것이라 생각했다. 고윤희에 대한, 어쩌면 나까지 포함된.

인호의 죽음이 내겐 엄청난 충격으로 다가왔다. 일종의 죄책감이었다. 인호의 죽음에 일조를 했다는 자책감이 끊임없이 날 괴롭혔다. 고윤희는 인호가 휘두른 복수의 칼을 어떻게 피했는지 알 수 없다. 난 그 칼을 자청해서 맞았다.  

아마 고윤희는 내게 한 것처럼 인호에게도 그저 바람이었다고 말했을 것이다. 봄이 오면 결혼 한다는 말과 함께. 그 말을 들은 인호 반응이 어땠을지는 상상이 가지 않는다. 나처럼 마지막 남은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도도한 척 했을까! 아니며 제발 한 번만 더 생각 해 보라고 매달렸을까. 인호 성격상 아무래도 나와 같지는 않았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인호는 나에 비해 집착이 강한 성격이었다.
#하얀여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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