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널드 그레그(84) 전 주한 미국대사
최경준
- 1973년 CIA 한국지부 총책임자를 맡았을 때, 당신의 임무는 무엇이었나?
"한국 내 활동하는 미국의 모든 정보기관을 관장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당시 중앙정보부장인 이후락과의 관계를 유지하면서 북한에 대한 많은 정보를 얻어내는 것도 내 주된 임무였다. 그러나 이후락이나 중앙정보부(중정부)는 북한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었다. 그들의 주된 임무는 정치적 반대 세력이 일어서는 것을 막는 것으로 보였다."
- 한국 정보기관들과는 어떤 식으로 관계를 유지했나?"기생파티를 자주 갔다. 한국 정보부나 군 장성들과 친구를 맺고 연락 관계를 유지했어야 했기 때문이다. 내가 CIA 서울 총책임자라는 사실을 모두 알고 있었기 때문에 직접 정보 취합에 나서지는 않았다."
- 이후락이 CIA의 정보원이라는 말도 있었다. 그는 어떤 인물이었나? "CIA의 정보원은 절대 아니다. 그는 지나치게 건방진데다, 그에게 권력이 모두 집중되어 있었다. 명실 공히 당시 제 2인자 아니었나. 북한에 가서 김일성을 만나고 온 그에게 김일성에 대한 인상을 물은 적이 있다. 나는 그가 '김일성 개자식, 정말 싫어, 총으로 쏴주고 싶었어'라는 식으로 말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엉터리 영어로, '매우 강력해! 일인통치! 대단한 사내야!'라고 말했다. 사실상 김일성을 칭송한 것이다.
유신을 단행하기로 한 뒤, 이후락이 나를 다시 찾아와서 말하기를 '민주주의를 고무시키기 위해서는 우리 스스로가 강력해져야 한다'고 했다. 그는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 잘못 이해하고 있었다. 이후락에 대한 인상을 더 이야기하자면, '김대중 납치 사건' 이후 김대중이 생환했을 때, 중정부에 대한 대학생들의 항의 시위가 잇달았다. 그래서 중정부는 최종길 서울대 법대교수를 체포했다. 최 교수가 고문에 의해 사망했는지, 고문을 피해 투신자살을 했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최 교수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알고 있었다. 충격을 받은 나는 워싱턴의 상관에게 이 내용을 보고하면서 '최 교수의 죽음을 한국 정부에 항의하고 싶다'고 말했다. 하지만 내 상관은 '한국 사람을 한국 사람으로부터 구하려고 하지 말라'고 말했다. 그것은 나의 임무가 아니니, 그냥 조용히 있으라고 했다. 그래서 나는 직장생활 중 처음으로 상관의 명령에 불복종했다.
박종규(대통령 경호실장)를 찾아가서 '공식적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내 기분(한국어로 '기분'이라고 말함)에 따라 말하는 것인데, 최 교수 사건은 끔찍한 일이다. 나는 한국 중정부와 함께 북한에 반대하여 활동하려고 하는데, 중정부는 국내 반대 세력을 억누르는 데 더 큰 관심을 갖고 있다. 나는 그들과 일하기가 거북하다'고 말했다. 그 일이 있은 후 1주일 뒤 이후락이 해고됐다."
- 이후락과 중정부가 국내 정치적 반대 세력을 억누르고 민주화 운동을 탄압한 것은 결국 미국의 이익과도 부합한 것 아니었나? 사실상 미국은 그들을 방조하거나 지원하지 않았나?"사실 많이 방조했다. 나도 그 점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런 식의 탄압이 일어날 때, (제지하지 않고) 무시하는 것은 잘못된 처사였다. 나는 CIA 요원과 얘기할 기회가 있을 때마다, 내가 상부 명령에 불복종한 얘기를 꼭 들려준다. 나는 이 불복종에 대해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덕분에 형편없는 중정부 수장이 해고됐고, 훨씬 좋은 후임자가 나왔다."
- 미국의 이익과 자신의 판단이 부합하지 않았을 때가 얼마나 자주 있었나?"방금 얘기한 상황이 그런 사례였다. 반대로 내 판단이 미국의 이익과 완전히 부합된 경우는 내가 미국대사로 한국에 근무할 때 일이다. 당시 미국은 남한에 핵무기를 배치하고 있으면서 북한의 핵무기 개발을 좌절시키려고 했다. 그러나 나는 미국이 남한에 핵을 배치한 이상, 북한이 그것을 핑계로 핵 개발을 할 것이라고 판단했다. 노태우 대통령을 만나서 북한이 핵 개발을 중지하도록 압력을 넣기 위해 남한에서 (미국의) 핵무기를 철수하는 것이 양국의 이해에 부합된다고 말했다. 노태우도 이에 동의했다."
성 김 대사 아버지 김재권씨와 그레그 전 대사
- 1989년 주한 미국대사로 부임할 당시 세계적으로는 동유럽 붕괴로 냉전이 해체되고, 한국은 1987년 이후 민주화 초기 단계였다. 이에 따라 한국에 대한 미국의 전략적 목표는 어떻게 변했고, 당신의 역할은 무엇이었나?"나의 전임자인 제임스 릴리 대사는 현재 그가 받고 있는 평가보다 더 후한 평가를 받아야한다고 생각한다. 노태우와 김대중, 김영삼이 대결한 직선제 선거는 남한 민주주의의 가장 중요한 순간이자 티핑 포인트(tipping point)였다. 1987년 대통령 직선제로의 전환을 이끄는 데 릴리가 매우 큰 역할을 했다."
- 대통령 직선제 개헌이나 민주화는 한국의 국내 문제인데, 주한 미국대사가 무슨 역할을 했다는 것인가?"릴리는 죽을 때까지 침묵했지만, 그는 직선제 개헌이 이뤄질 수 있도록 (당시 정부에) 압력을 가했다. 당시 온갖 시위가 있지 않았나. 모르긴 몰라도 당신들도 그 시위에 참여하지 않았나? 한국인들은 군부지도자들을 증오했고, 민주화가 시작되기를 원했다. 릴리는 자기 권한에서 할 수 있는 것을 다해 밀어붙였을 것이다.
나는 6년 반 동안 아버지 부시 대통령의 안보참모였다. 그가 부통령일 때도 그를 수행해 한국에 갔었다. 나는 아버지 부시에게 한국 국회에서 연설하도록 권했고, 실제 그는 연설했다. 당시 한국의 대통령은 너무 강력한 데 비해 의회는 허약했다. 그래서 부시가 연설을 하면 의회의 힘이 강해지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대사로 부임할 즈음, 한국은 동유럽 국가 중 수교한 나라가 단 하나였다. 중국도 러시아도 미 수교국이었다. 나는 한국이 모든 동유럽 국가와 수교하도록 돕겠다고 공언했다. 그래서 1990년 샌프란시스코에서 부시가 노태우를 고르바초프에게 소개했다. 중국대사를 지낸 부시는 중국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사람인데, 그가 중국에게 남한의 유엔 가입 반대를 철회하도록 권고했다. 그래서 남북이 동시에 유엔에 가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