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자전거를 한 번도 탄 적 없던 여성, 런던데리가 세계자전거여행을 한 일은 큰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사진은 런던데리의 자전거여행기를 담은 책 '발칙한 자전거세계일주'.
미지북스
자전거여행자 가운데 애니 런던데리(annie londonderry)의 사례는 특히 독특했다. 1894년 당시 애니는 가사와 육아에 지쳐 일상탈출을 꿈꾸는 24살 유부녀였다. 그런 그에게 자전거로 세계여행을 하면 1만 달러를 주겠다고 남자들이 제안한다.
물론 터무니없는 제안이었다. 애니는 한 번도 자전거를 탄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더해 자전거를 타고 세계를 도는 동안 5천 달러를 벌어야 한다는 게 내기 조건이었다. 한 번도 세상밖으로 나가본 적이 없는 유부녀에게 자전거를 탄다는 것도 5천 달러를 번다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애니는 꽤 영리했다. 지금 봐도 그 담대함이 놀랍다. 본명인 코프쵸스키를 온천수 회사 이름인 런던데리로 바꾸고 대신 회사에서 여행경비로 쓸 후원금을 받아낸다. 여행 시작 때부터 여행담을 적극적으로 홍보하기 시작해 가는 곳마다 화제를 불러일으킨다. 그 해 3월 뉴욕에서 시작한 애니의 여행은 프랑스, 이집트, 예루살렘, 예멘, 스리랑카, 미국을 돌면서 이듬해 9월 마무리된다.
그런 소식은 우리나라에도 알려지기 시작했다. 1920년대 중반에 이르면 러시아인 3명이 모스크바를 떠나 연해주, 나가사키(일본), 샌프란시스코(미국), 멕시코를 여행한 일이나 또다른 모스크바 사람이 만주 봉천을 떠나 세계여행 중이라는 기사가 실린다.
조선땅에서도 자전거로 전국을 보고 싶은 이들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여러 사람들이 있었겠으나 지면을 뜨겁게 달군 자전거여행계의 스타가 나타났으니 바로 맹훈태다.
함경북도 웅기에 살던 맹훈태(당시 30세)는 자전거를 타고 조선 전역을 돌겠다는 목표를 세운다. 경비는 '0'. 돈 한 푼 없이 여행하는 무전여행을 계획했다.
출발일은 1926년 4월 28일. 춥지도 덥지도 않은 시기를 골랐으니 여러 가지를 고려한 끝에 나온 결정이었을 것이다.
당시 맹훈태의 조선자전거여행은 <시대일보>와 <동아일보>가 지면중계를 했다. 이런 식이었다.
"10일간 휴양하고 지난 28일에 개성을 향하고..."(시대일보 1926년 5월 31일) "지난 2일 오후 3시에 수원에 도착하야..."(시대일보 1926년 6월 4일) "지난 19일에 마산을 출발하여 정오에 진영에 내착하여"(동아일보 1926년 6월 23일) "24일 불국사로 향하였는데 동 군의 여정은 대구, 상주, 충북..."(시대일보 1926년 6월 28일) 그의 이동경로를 이들 신문이 일일이 소개할 정도로 맹씨의 여행은 큰 관심사였다. 맹씨는 이들 신문사 지국에서 밥을 얻어먹고 때로는 잠을 자기도 했다. 신문사는 기삿거리를 얻고, 자전거여행자는 숙식을 얻었으니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격이었다. 맹훈태 또한 꽤 넉살 좋은 여행자였음을 알 수 있다.
7월 10일에도 여행 중인데 그때까지 여행한 거리가 9천여리(약 3535km)였다. 그 뒤에도 황해도, 평안남북도를 더 둘러봤으니 달린 거리는 최소한 4000km가 넘은 것으로 보인다. 돈 한 푼 없이 전국을 둘러보는 자전거여행자에 대한 기사가 연이어 신문에 실렸으니 사람들은 "나도 한 번"이라고 자연스럽게 생각하지 않았을까.
자전거여행은 특성상 극기여행이기도 하다. 언덕과 바람, 비포장길을 헤치며 오로지 제 힘으로 달려야 하기 때문이다. 기운이 떨어질수록 고통은 오히려 커진다.
소년운동의 한 갈래였던 '소년척후단'(少年斥候團, 1922년 발족, 뒤에 조선소년단으로 개명)이 자전거를 타고 교외여행을 한 것은 꽤 괜찮은 프로그램이었다. 소년척후단을 만든 이는 중앙고보 체조교사였던 조철호로 1926년 6·10만세사건(조선 마지막 임금인 순종의 장례식날 일어난 독립만세운동)의 정신적 지주였다 하니 그가 자전거여행을 통해 전하려 한 메시지가 무엇이었을지 짐작할 수 있다.
1927년 경성배제고등보통학교 체조교사 최계남과 학생 2명도 방학을 이용해 함께 호남지방 자전거일주를 했다. 자전거여행을 하면 같이 고생을 하게 되니 쉽게 가까워진다. 혼자서는 갈 수 없으니 낮엔 앞서거니 뒤서거니, 밀어주고 끌어주며 달렸을 테고, 밤에 한 이불을 덮고 누워 속내를 털어놓았을 것이다.
자전거는 느린데다 샛길통행에 유리하기 때문에 이 땅 곳곳을 살펴보는데도 적당했다. 이 땅을 답사하려는 이들이 자전거를 타고 다녔다. 아르메니아 사람인 '마이켈 바비에후'(당시 53세)는 학술과학상 재료를 만들 목적으로 자전거를 타고 세계를 돌아다녔는데, 조선 땅에도 발을 디뎠다. 1933년 동경명치대학생 김경석과 한만영이 여름방학 동안 자전거를 타고 일본과 조선땅을 누빈 이유 또한 농민생활상 조사였다.
이처럼 자전거여행은 극기여행, 지리탐사, 학술탐사 등 여러 목적에 쓰였으나 주로 관심을 끈 것은 여가활동이었다. 자전거여행에 주목한 이들도 그랬다. 1920년대 자전거여행이 인기를 끌면서 몇몇 신문사들이 상품을 개발해 사람을 모집한다. <동아일보>, <조선일보>, <조선중앙일보>, <시대일보>와 같은 일간지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