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권사진 즉석 촬영? 우린 죽으란 말이냐"

정부 여권사진 서비스 개선에 동네사진관들 아우성

등록 2012.01.10 20:58수정 2012.01.10 2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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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잡한 여권사진규정 ⓒ 외교통상부


양쪽 귀와 양쪽 눈썹을 가려서는 안 된다. 뿔테 안경은 안 되고 너무 큰 귀걸이도 안 된다. 흰옷을 입으면 안 되지만 뒷배경은 반드시 흰색이어야 한다. '뽀샵질'을 하면 절대 안 된다.

이렇게 까다로운 사진이 있다. 바로 여권사진이다. 전 세계 오대양 육대주에 수십억의 사람들이 살고 있고, 그 중엔 별별 모습의 사람들이 다 있으니 그들이 사용하는 여권의 사진을 엄격하게 규정하는 게 당연하다.

여권사진을 일반 신분증에 사진처럼 우습게 알고 대충 디카로 찍은 걸로 해결하려다 구청에서 '빠꾸' 당해 낭패를 본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그러고 나면 다른 건 몰라도 여권사진만은 꼭 동네 사진관에서 찍게 된다.

여권사진을 이젠 창구에서 찍어준다고?

까다로운 여권사진 규정 때문에 한 번쯤 곤욕을 치른 적 있는 민원인들에게 새해 벽두부터 귀가 번쩍 뜨이는 소식이 들려왔다.

외교통상부는 지난 3일 여권사진을 여권발급 대행기관(시·도, 시·군·구)에서 직접 촬영하는 '전자여권 얼굴영상 실시간 취득 시스템'을 올 하반기부터 시범 도입하겠다고 발표했다. 앞으로는 여권사진을 신청할 때 즉석에서 찍어주겠다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사진관에서 촬영한 사진을 제출할 필요가 없어 비용이 절약되고, 여권사진 규격에 맞지 않는 사진으로 인해 재촬영해야 하는 번거로움도 사라질 것으로 기대된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외교통상부는 이같은 조치를 올 하반기 10개 지자체에서 시범적으로 도입한 다음, 내년 하반기에는 국내외 여권신청기관으로 확대할 예정이다. 그러나, 이같은 '선의'에 의한 정책이 예상치 못했던 곳에서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무심코 던진 돌에 맞은 '동네 사진관들'


사진관 내부 전경. 정부는 10여년 전에도 주민등록증 사진을 동사무소에서 직접 찍어주다가 민원인들의 불만에 부딪쳐 포기했었다. ⓒ 강경석


조치가 발표되자마자 일선 사진관들이 들고 일어섰다. 이들은 이구동성으로 외교통상부의 조치가 가뜩이나 어렵게 운영하고 있는 사진관들에게 치명타를 안겨줄 것이라고 주장했다.

서울 서대문구에서 사진관을 운영하고 있는 강아무개(53)씨는 "사람들이 디카나 폰카로 직접 손쉽게 사진을 찍는 세상에서 동네 사진관들은 여권사진으로 그나마 유지하고 있는데, 그마저 못한다면 살 길이 막막하다"며 "특히 구청 근처 사진관들은 문을 닫는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강원도 평창에서 <오마이뉴스>에 전화한 박아무개(49)씨도 "그간 겨우 여권, 주민등록증, 이력서, 운전면허증 등에 들어가는 서류사진(증명사진)으로 먹고 살아온 3만여 사진관업자와 그들의 가족, 직원들의 생존권을 위협하는 처사"라며 "민원인들은 편하고 금전적으로 이득이겠지만, 영세 자영업인 사진관은 어려워질 수밖에 없다"고 하소연했다. 그는 이어 "마치 시청이나 구청 안에 마트를 지어놓고 물건을 공짜로 공급하는 것과 다를 게 없다"고 어이없어 했다.

외교통상부 홈페이지 자유게시판에도 10일 현재까지 '생존권을 위협받는' 3백여 명의 사진관 업자와 그 가족들이 올린 비난글이 빗발쳤다.

"그대들은 무심코 돌멩이를 던졌는지 모르지만 그 돌멩이를 맞은 전국의 3만 영세 사진관들은 사경을 헤맨다는 것을 아십니까."(전성준)

"제가 일하는 동네는 10년 동안 사진관 10곳 중 8곳이 문을 닫고 2곳만 남았을 정도로 대단히 힘듭니다. 여권사진을 나라에서 해준다면 사진으로 가족의 삶을 유지하는 사람들은 죽어야 하나요."(문형주)

"(남편이 하는) 사진관 매출의 30% 정도 차지하는 여권사진을 공짜로 찍어줘버리면 진짜 사진관 문닫아야 할 것 같다고 하네요. 한 달에 겨우 200만 원 정도 벌까말까 하는데 여기서 50-60만 원 적게 들어오면 사진관 접고 좌판 펴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착잡하네요."(조연아)


"주민증 사진도 무료로 찍어주다가 혈세만 낭비"


지난 3일 여권 사진을 즉석에서 찍어주겠다는 정부 발표이후 외교통상부 홈페이지 자유게시판에는 사진관 종사자들의 항의글이 봇물을 이루고 있다.


이번 조치가 지난 과거 동사무소에서 주민등록증 사진을 무료로 촬영해줬다가 철회했던 것에 비유하는 사람도 있다. 정부는 지난 1999년 기존의 종이 주민증을 플라스틱 주민증으로 교체하면서 전국 읍·면·동사무소에서 주민들의 사진을 디지털 카메라로 무료 촬영해줬었다.

"전에 동사무소에서 주민등록증 사진 무료 촬영한다고 장비투자에 600억 이상 혈세를 낭비하지 않았나요? 사진이 맘에 안 들어 다시 사진관으로 가면 그 시간과 비용은 누가 책임지나요?"(김종근)

평창의 박아무개씨도 "10년 전 주민등록증 사진을 동사무소에서 찍어줬으나, 열악한 디지털 장비 때문에 품질이 형편 없어 얼마 못하고 그만뒀다"며 "당시 민원인들이 사진관에 와서 다시 찍어가기도 했다"고 회상했다.

"진정으로 서민들을 위한다면 차라리 (여권사진 무료촬영 대신) 인지대 같은 수수료를 낮춰줘라"는 의견도 있었다.

"사진관 사진도 수용하겠다" - "주민등록증 교훈 잊었나"

이에 대해 외교통상부 여권과 관계자는 사진관 업자들의 반발에 대해 "당장 시행하는 게 아니라 올해 4/4분기에 시범으로 시스템을 개발한 뒤 내년 하반기부터 점진적으로 확대해나갈 계획"이며, "모든 여권사진을 의무적으로 즉석에서 찍어주는 게 아니고, 민원인 본인이 원하면 사진관에서 찍어온 사진을 수용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또한 과거 주민등록증 사진을 동사무소에서 즉석으로 찍어줬다가 흐지부지됐다는 지적에 대해서는 "그땐 10여 년 전 일로 디지털 기술이 낮았으나 지금은 많이 발전해서 해상도가 높아졌다"고 말했다.

한편, 사진관 업자들의 모임인 한국프로사진협회는 9일 오후 비상대책회의를 갖고 향후 대응조치를 논의했다.

이재범 비상대책위 본부장은 <오마이뉴스>와 가진 전화통화에서 "여권사진을 정부에서 찍어주면 당장 민원인들의 편의를 증진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수많은 사진관이 무너질 뿐만 아니라 카메라, 프린터, 인화지, 잉크 등 업계에도 심각한 타격을 줄 수밖에 없다"면서 "정부가 과거 주민등록증 사진 때의 교훈을 잊은 듯하다"고 말했다.

이 본부장은 "협회 차원에서 관계 부처에 자제를 촉구하는 성명서를 내는 등 입장을 밝히고 서명운동에 들어갈 예정"이라며 "그게 안 되면, 회원들이 모여 궐기대회를 여는 등 모든 수단을 동원해 막을 것"이라고 밝혔다.
#여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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