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키나와 대외무역의 거점이자 오키나와의 왕성인 슈리성의 유적지. 2000년 12월 세계유산에 등록되었다. 이 사진은 오키나와현청이 발간한 팸플릿에 실려 있다.
오키나와현
그런데 콜럼버스, 바스코 다가마, 마젤란 등의 활약으로 전 세계의 바닷길이 통합된 16세기부터 오키나와는 쇠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포르투갈·네덜란드를 비롯한 서양열강이 동아시아 해역의 무역중계권을 장악함과 동시에 일본이 변방의 지위를 벗어나 해양활동을 적극 전개하면서 오키나와의 위상이 약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이 시기의 조선 역시, 바닷길을 통해 서양 조총을 입수하고 면모를 일신한 일본에게 대규모 침략을 당했다(임진왜란). 백제 멸망 이후 위상이 추락한 일본이 대륙을 상대로 전면 침공을 감행할 수 있게 된 것은 바닷길 통합 이후 일본이 급격히 성장했기 때문이다. 바닷길 통합이 오키나와뿐 아니라 조선에도 불리하게 작용했던 것이다.
경제적 위상의 약화는 정치적·국제적 위상의 약화로 이어졌다. 오키나와는 임진왜란 종전 10년 뒤인 1609년부터 일본 사츠마번의 내정간섭을 받았다. 중국에 이어 일본과도 사대관계를 체결한 것이다.
하지만, 중국도 사대관계를 근거로 연고권을 주장했기에, 일본은 오키나와를 독차지할 수 없었다. 이로 인해 오키나와는 중·일 양쪽을 똑같이 상국으로 인정하는 양속(兩屬) 상태에 들어갔다. 양속이란 등거리 외교 같은 것이었다.
양속을 지렛대로 독립을 유지하던 오키나와의 운명을 바꿔놓은 것은 1871년 11월 동지나 해상에서 발생한 태풍이었다. 때마침 69명을 태우고 항해하던 오키나와 선박이 이 태풍에 휩쓸려 중국령 대만에 표류했고, 이들 중 54명이 현지인들에게 피살됐다.
이 사건을 세력 확장의 호기로 파악한 일본은 '오키나와는 일본 땅'이라고 주장하며 청나라에 손해배상을 청구했다. 청나라도 오키나와의 상국이라는 사실을 무시한 채, 자국만이 오키나와에 대해 연고권을 갖고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
협상이 실패하자, 일본은 대만 침공(1874)을 감행했다. 기세에 눌린 청나라는 '오키나와는 일본 땅'이라고 인정하고 배상금 50만 량을 지불하기로 했다. 이 여세를 몰아, 일본은 1879년에 이토 히로부미의 지휘 아래 오키나와 합병을 성사시켰다.
오키나와가 일본에 넘어가는 것을 지켜본 청나라는 '일본의 다음 목표는 조선'이라는 판단 하에 1879년부터 '신(新)조선 전략'을 개시했다. 신조선 전략이란 조선의 자율성을 존중하던 종래의 정책을 폐기하고 조선 문제에 적극 개입하여 자국의 영향을 증대하려는 것이었다.
일본과 서양열강이 조선을 경유해서 중국을 침략할 가능성을 사전에 차단하자는 것이 이 전략의 목표였다. 오키나와 합병이 청나라의 대(對)조선 전략을 바꾸는 역할을 한 것이다.
새로운 전략에 따라 청나라는 임오군란(1882)에 대한 무력 개입을 통해 조선의 내정·외교를 장악한 데 이어, 갑신정변(1884)에 대한 무력 개입을 통해 조선에 대한 영향력을 공고히 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이것은 일본의 반격을 초래했다. 1886년부터 해군력 증강에 돌입한 일본은 이런 성과를 바탕으로 동학농민전쟁(1894)에 개입하고 서해에서 중국 북양해군을 궤멸시켰다(청일전쟁). 이로써 청나라는 조선에서 쫓겨났다. 뒤이어 일본은 러시아와의 경쟁을 거쳐 1899년부터는 조선을 사실상 장악했고, 이것이 1910년의 조선 강점으로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