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도막이 서 있는 국민교육헌장
김강임
사람들이 가끔 나를 놀랍고 측은한 시선으로 바라볼 때가 있다. 내가 초등학교도 졸업을 안 했다는 얘기를 했을 때이다. 사람들의 그런 시선에는 아마도 이런 전제가 깔려 있을 것이다. 얼마나 가난했으면 초등학교 졸업도 안 했어?
하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다. 집이 가난한 건 사실이었지만 초등학교 졸업조차 못할 정도로 가난한 건 아니었다. 학교가 나를 학교에 다니지 못하게 했다면 억지일 수도 있겠다. 억지인 줄 알면서도 억지를 부려야만 하는 이 마음을 누가 알아주기를 바라지는 않는다 해도, 내 인생에서 학교는 자살과 더불어 영원히 풀리지 않을 '딜레마'임이 분명해 보인다. 왜냐하면 나는 아직도 교육부의 관리 감독을 받는 학교의 효용성에 굉장한 의문을 갖고 있고, 자살을 범죄로 간주하는 분들의 입을 매우 수상한 눈으로 바라봐야만 하기 때문이다.
1960년대 후반, 초등학교 6학년, 1학기가 시작되자마자 국민교육헌장을 외워 오라는 숙제가 떨어졌다. 그런데 너무 재미가 없어서 한 번 읽어보고 말았다. 아니 어쩌면 끝까지 다 읽어보지도 못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내 '수준'에 안 맞는다고 생각했으니까.
그 무렵에 나는 박목월의 '나그네'나 김소월의 '초혼' 같은 시들을 줄줄이 외고 있었다. 그 뜻을 온전히 알아서 읊조리고 다닌 것은 아니었고, 아마도 그 감각적인 어휘가 좋아서 그랬을 것이다. 얼마나 좋은가. '강나루 건너서 밀밭 길을 구름에 달 가듯 가는 나그네'라든가,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 허공중에 헤어진 이름이여' 같은 단어와 단어의 조합들, 얼마나 좋은가.
방과 후에는 서당에서 <명심보감>이나 <사자소학>을 읽었다. 하지만 집에 와서 혼자 있을 때는 아버지가 가끔 펼쳐보는 <시경>을 들여다 보곤 했다. 그 또한 무엇을 제대로 알아서 본 것은 아니었다. <시경>은, 그것은 경자가 들어가서 뭔가 엄숙한 것 같아도 사실은 연애시 모음집이었다. 남자와 여자가 만나서 사랑을 하고 헤어지는, 그래서 뭔가 점액질 같은 것이 뭉글뭉글 느껴지는 내용들이었다.
'이웃집 마나님 나를 생각하고 나도 또한 그 여인 생각에 잠을 못 이루네. 서로가 생각을 하건만 얼싸안지 못하는 우리는 어인 까닭인가'. 등등 대체로 그런 내용이 주를 이루고 있는 <시경>은 막 사춘기로 접어든 내게 하나의 별천지였다.
훨씬 나중에야 그것이 정치 사회적인 일종의 알레고리라는 것을 알기는 했지만, 어쨌든 처음 읽는 내게 시경의 시들은 그 어떤 연애 이야기 못지 않게 달큰하고 새큼하고 짭짤한 맛이 입안에 가득 고이는 '오마주'였다. 그런 내게 국민교육헌장은 뭐라고나 할까, '어버이 수령님'과 하나도 다를 게 없는, '하나님 아버지'와 거의 동급인 거대하고 무서워서 피해가고 싶은 무엇일 뿐이었다.
'국민교육헌장' 못 외운 학생에게 가해졌던 매타작
국민교육헌장과 새마을운동 |
국민교육헌장의 제정 취지는 본격적인 산업사회와 함께 물질만능 시대가 도래하면서 정신세계가 황폐화되고, 조상의 훌륭한 전통이 위협받고 있다는 데서 출발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박정희 대통령은 얼마 뒤에 새마을운동을 재창하게 된다. 새마을운동은 물질적 풍요를 구가하자는 것이었고, 그를 위해서라면 불합리하거나 효율성 면에서 뒤처지는 것으로 판단되는 모든 전통적 가치나 풍습들을 퇴출한다는 것을 기본 전제로 깔고 있다.
이때부터 아이들의 놀이는 전통적인 자치기라든가 수건돌리기 같은 것에서 구슬따먹기라든가 꽃패놀이 같은 도박성이 강한 것으로 바뀌어 갔고, 어른들은 세시풍습을 멀리 하게 되었으며, 각종 풍물놀이 기구들은 새마을 창고에 처박히게 되었다. 농촌에서 새마을 운동을 가장 극적으로 대변한 것은 아마도 '작업반'이란 이름의 노동조직이라 해야 할 것이다.
북한의 '천리마운동'을 연상케 하는 이 조직에 가입하면 적어도 1.5배, 많게는 두세 배까지 수입이 늘게 되는데 그 대가로 집안 살림을 거의 포기해야 했다. 갓난쟁이를 집에 두고 나온 새댁은 젖이 퉁퉁 불어서 논바닥에 짜 내야 했고, 갓난쟁이는 마루에서 굴러 떨어져 머리가 깨지고 팔다리가 부러지는 등의 고난을 감수해야 했다.
이렇게 해서 국민교육헌장의 제정취지와는 완전히 배치되는 물질만능 시대가 바야흐로 활짝 꽃 피우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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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학교에서 그것을 외워 오란다. 외우는 것이라면 사실 누구보다 자신은 있었다. 서당의 공부라는 것이 책을 통째로 외우는 것이었으니까.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놈의 국민교육헌장은 그게 안 되는 거였다.
하긴 처음에 한 번 훑어본 뒤로 두 번 다시 보고 있지도 않았다. 너무 재미가 없었다. 연애 이야기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눈물이나 피 냄새 정도는 맡아져야 할 것 아닌가 말이다. 아무런 느낌도, 맛도 색깔도 소리도 없는 것을 어떻게 외우라는 것인가.
고백하자면 나는 지금도 국민교육헌장은 그 내용을 알지 못한다. 첫 문장 하나만 달랑 기억하고 있을 뿐이다.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 라고 되어 있는 그 딱 한 줄은 지금도 언제든 읊어낼 수 있기는 하다.
어쨌든 그랬다. 아침마다 한 시간은 그놈의 국민교육헌장 점검으로 채워졌다. 누가 다 외웠는지, 누가 아직도 못 외웠는지를 점검하기 위해 학생들을 일일이 한 명씩 호명하는 살벌한 분위기가 매일 되풀이되었다. 얼마나 외웠는지, 얼마나 못 외웠는지에 따라 체벌의 강도가 정해졌다.
지금은 체벌이 사회문제로까지 부상했지만, 당시의 체벌은 거두절미하고 그냥 상식이었다. 떠들어도 때리고 시험 점수가 안 좋게 나와도 때리고 숙제를 안 해 와도 때렸다. 보통은 종아리를 걷게 하고 회초리를 때렸지만 그날은 그것조차도 아니었다.
삼십 센티 대나무 잣대를 모로 세워서 손바닥을 두들겨 팼다. 아파서 얼결에 손바닥을 뒤집으면 손등을 두들겨 팼다. 때리는 것이 아니라 팔뚝에 있는 힘을 다 모아서 두들겨 패는데 무슨 원수라도 만난 것 같았다. 눈에서 눈물이 마구 쏟아졌다. 맞을 때도 아팠지만, 맞고 난 뒤에는 더 아팠다. 손바닥에서는 불이라도 난 것 같았고, 손등에서는 피가 나오다가 맺혀서 굳어갔다. 눈물 범벅이 된 눈으로 손등을 쳐다보고 있는 내 입에서 전혀 뜻밖의 한 마디가 튀어 나왔다.
"아이고 씨X, 아퍼라 X도 씨X……."그 한 마디, 그 한 마디로 내 운명은 완전히 다른 길로 접어들게 되었다. 선생님은 하이힐 소리도 용감하게 내 앞으로 달려오시더니 한쪽 귀를 잡아서 번쩍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그대로 교실을 빠져 나왔다. 그 상태 그대로,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채 끌려갔는데 한참 가다 보니 집으로 가는 길이었다. 세상에, 얼마나 기막히게 화가 났으면 체벌도 포기하고 학생을 집으로까지 끌고 갔던 것일까. 학교에서 집까지는 빠르게 걸어도 20여 분 거리였다. 그 먼 길을 선생님은 처음 자세 그대로, 내 귀를 움켜잡은 그대로 우리 집에까지 도착했다.
선은 이렇고 후는 이렇고, 등등 자초지종이 선생님의 입에서 줄줄이 쏟아져 나왔다. 아버지는 얼굴이 홍당무가 되어 어쩔 줄을 몰라 하셨다. 그리고 나는, 도살장으로 끌려 들어가는 소의 마음이 그런 것일까. 눈앞이 노랗고 빨갛고 총천연색으로 흔들리다가 캄캄해져 버렸다.
아버지가 육군중사 출신이었다. 군대를 기피하려다가 잡혀가듯이 군대에 간 뒤로는 엉뚱하게도 직업군인을 소망했던, 그러나 혼자서는 못 살겠다고 눈물바람을 하는 어머니 때문에 제대를 한 아버지는 매사에 모범을 보여야 한다는 일종의 강박관념을 앓고 있었다고나 할까. 결혼한 지 십여 년 만에 본 자식이었음에도 아들이 밖에서 누구와 싸움만 하고 들어와도 이유불문, 나쁜 놈으로 규정하고 곡괭이 자루를 들고 나섰다.
그런데 자식이 하늘처럼 섬겨야 할 선생님에게 '씨X X도'라는 어마어마한 무례를 범했다. 이놈을 살려줄 필요가 있을까? 아버지는 아마 그런 생각으로 머리가 잠시 아프기도 했을 것이다. 어쨌든 용서할 수 없는, 용서해서는 안 될 자식이었다. 이런 자식이 내 자식이라니, 기가 막히기도 했을 것이다.
그날 나는 곡괭이 자루로 엉덩이가 찢어지도록 얻어터졌다. 어머니는 부엌에서 내 새끼 죽인다고 울고불고 난리를 냈고, 자식새끼를 초주검으로 만든 아버지는 그제야 분이 풀리기는 했지만 부엌에서 훌쩍훌쩍 울고 있는 아내를 의식하게 되면서 자기가 지금 무슨 일을 저질렀는가를 명료하게 인식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술집으로 갔고, 밤이 늦도록 술로 자신의 헛헛한 가슴을 채운 다음 집으로 와서는 이불 속에서 신음하고 있는 아들을 일으켜 앉혔다.
"네가 이놈아, 응? 애비 얼굴에 똥칠을 해서야 쓰겠냐."등등 장황한 설교가 있었지만, 나는 이미 결심이 서 있었다. 날만 밝아라. 그러면 나도 이제 끝이다. 학교에서는 선생님에게 얻어맞고, 집에서는 아버지에게 얻어맞아야 하는 나는 대체 무슨 '물건'인 것이냐, 하는 그런 어떤 '성찰'의 시간이 내게 있었다. 살아야 할 이유가 도무지 없다는 결론이 아주 명쾌하게 나왔다.
학교에서도 맞고 집에서도... '내가 무슨 물건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