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강점기에 이르면 자전거 도둑들은 보다 전문화된다. 훔치는 사람과 파는 사람이 역할을 나누고, 몇명씩 뭉쳐서 훔치기도 한다. 영화 <노벨상 메달 도둑> 중
수만 고쉬
1933년 4월 체포된 김인업은 조선을 종횡무진하며 범죄 행각을 벌였다. 경기도와 함경남도, 평안남도를 누비며 범죄 행각을 벌였으니 활동 범위가 전국구임 셈이였다. 범죄 유형도 강도, 사기, 절도 등으로 화려했다. 시작은 자전거였으니 그가 자전거를 훔쳐서 판 방법을 보면 당시 훔친 자전거를 어떻게 거래했는지 엿볼 수 있다.
그는 경성의 한 자전거 점포에서 자전거를 빌려서 그 길로 곧장 원산으로 떠났다. 경성과 원산을 잇는 철도노선 거리로만 따져도 223.7km. 자전거 길은 그보다 더 길었을 게 분명하다. 경성에서는 아예 찾지 못하도록 멀리 떨어진 원산에 가서 처분한 것이다.
당시 경성에서 자전거를 훔쳐 천안으로 보내려다 잡힌 범인도 있었던 것을 보면 당시 자전거 전문 도둑들은 주로 경성에서 훔친 뒤 타 지방으로 보내는 방법을 쓴 것으로 보인다.
자전거 전문 절도범은 팀을 이뤄 작업을 하기도 했는데, 1935년 체포된 박부돌 일당이 이에 해당한다. 팀원은 모두 네 명. 부산과 김해 창원 일대에서 활동한 이들은 역시 대도시에서 훔치고 소도시에서 파는 방식을 택했다. 부산에서 훔쳐서 김해로 옮긴 뒤 창원에서 파는 방식을 썼다. 경찰에 잡힐 당시 파악된 자전거대수가 121대였으니 간 큰 절도단이었다.
그렇다면 당시 자전거를 훔치면 어느 정도 돈을 만질 수 있었을까. 자전거 전문 절도범이었던 허경인은 자전거를 훔쳐 판 돈으로 장가를 가고, 호사스런 생활을 했다. 별다른 직업이 없었는데도 결혼 자금과 생활 자금을 마련했으니 자전거 절도로 생긴 수입이 꽤 쏠쏠했나 보다.
앞서 부산 일대에서 자전거를 훔치다 잡힌 박부돌 일당이 훔친 자전거는 모두 4200여 원 어치였다. 1930년초 쌀 한 가마값은 약 10원 정도. 현재 80kg짜리 쌀 한 가마니 가격은 16만5천 원(2011년 11월 5일 기준)이니 지금 돈으로 치면 7천만 원 정도를 훔친 셈이다.
호사스런 생활을 위해 자전거를 훔치는 이들도 있었지만, 모두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먹고 살 길이 막막해 막다른 골목에서 자전거를 훔친 이들도 있었다. 1935년 1월 27일 치 <동아일보>에 보도된 한 부자의 사연이 그렇다.
경성부 외곽 신당리에 살던 13살 소년 정재석은 아버지가 어렵게 행상을 하는 게 안타까웠다. 무거운 짐을 등에 짊어지고 먼 길을 다니는 것을 보면서 소년은 "만약 자전거만 있었더라면…"이라고 생각한 모양이다.
방법은 알았으나 소년은 어디서 자전거를 구할 수 없었다. 궁리 끝에 택한 게 돈을 훔치는 것. 소년은 훔친 돈을 아버지에게 갖다드렸고, 아버지는 그 돈으로 자전거를 사서 행상을 다녔다.
아들은 아버지를 위하는 마음에서 그리 했으나 끝내 아들이 돈을 훔친 게 탄로나 부자는 경찰서에 잡히는 신세가 된다. 이들 부자가 그 뒤 어떤 처벌을 받았는지는 알 수 없으나 당시 고단한 조선 백성들의 아픔이 느껴진다.
지금도 그렇지만 자전거 주인들은 도난을 막기 위해 여러 방법을 찾는다. 안전한 자물쇠를 찾거나 특정 부품을 떼어 들고 다니기도 한다. 접어서 아예 곁에 두는 방법을 쓰기도 하고. 덴마크의 한 자전거 회사는 도둑이 자물쇠를 끊으면 아예 자전거를 타지 못하게 만드는 기술을 고안하기도 했단다.
당시에도 마찬가지였다. 여러 가지 도난 방지 방법이 나왔는데, 1937년 특허공고를 받은 '명함입자전거차체'는 독특한 방법이었다. 자전거 튜브 속에 자전거를 만든 사람 이름과 소유자 이름을 적는 것이었는데, 도난 방지용이라기보다는 도난 후 찾는 용도였다고 보는 게 맞겠다.
잃어버린 자전거를 3년 만에 찾는 일도 있었으니, 아예 효과가 없었다고는 할 수 없었으나 귀가 번쩍 뜨이는 대안은 아니었다.
날로 진화하는 자전거 도둑들, 잠금장치만으로는 한계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