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탕카멘과 아케세나문투탕카멘의 금박 목조 왕좌에는, 파라오에게 기름을 발라 주는 왕비의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박경
신왕국(BC 1550~1075) 파라오들의 무덤을 찾아서그곳은 누런 황금빛 바위산이 첩첩했다. 당장이라도 돌부스러기들이 용암처럼 흘러내릴 것만 같은 곳. 깊숙한 곳까지 차가 기어 들어가는 동안, 차창에 코를 박고 휘돌아 가는 골짜기를 넋놓고 바라봤다. 도굴을 피하기 위해 깊은 골짜기에 만들어진 파라오들의 공동묘지를 찾아가는 길.
남북으로 흐르는 나일강은 룩소르를 동안과 서안으로 갈랐다. 동쪽은 살아있는 사람들과 신들을 위한 공간, 해가 지는 서쪽은 망자들의 공간. 그리하여 '왕가의 계곡'은 룩소르의 나일강 서안에 자리잡게 됐다.
속을 비워내고 두꺼비집처럼 구멍이 뻥 뚫린 파라오의 무덤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지금까지 발견된 묘는 60여 기, 발견된 순서에 따라 고유 번호가 매겨져 있고, 그 가운데 개방된 무덤 중에서도 세 군데만 골라 구경할 수 있다.
가장 길고 깊다는 세티 1세의 무덤을 보고 싶었지만 개방되지 않았다. 어느 파라오의 무덤이 어떤 뚜렷한 특징을 가지고 있는지 잘 모를 바에야 그냥 발길 닿는 데로 들어가 보기로 했다. 람세스 3세와 9세, 람세스 2세의 아들인 메네프타의 무덤을 둘러봤다.
무덤 구석구석에 숨어 있는 관리인들은 누가 사진을 찍나 감시를 하기도 하지만, 졸졸 따라 다니면서 알아듣기 힘든 영어 발음으로 듣거나 말거나 벽화를 설명해 주기도 한다. 그들은 배를 탄 장례식 장면이나 오시리스와 이시스를 가리키며 열심히 설명해 준다. 잠깐이라도 귀를 기울였다면 1달러의 팁을 순순히 내준다. 하루 종일 답답한 무덤 속을 지키는 수고로움에 대한 작은 성의쯤으로 생각해도 좋을 것이다.
그때부터는 조용히, 천천히, 더는 방해 없이 무덤 속을 감상할 수가 있다. 메네프타의 무덤 속 통로 중간에는 석관이 남겨져 있었다. 지상으로 이어지는 길은 경사가 제법 심했다. 그 무겁고 큰 석관을 끙끙거리며 옮기던 도굴꾼들이 포기하는 모습이 떠올라 슬며시 웃음이 났다. 실컷 고생하고 그만 둔 게, 내가 다 안타까운 생각이 들 정도로 석관은 어마어마하게 무거워 보였다. '조금만 더 참지, 오죽 무거웠으면 이만큼이나 옮겼는데 포기했을까' 싶은 생각이 들 정도다.
황금보다 꽃...투탕카멘이 감동적인 이유피라미드가 도굴된 것을 본 파라오는, 더 이상 왕들의 무덤이 훼손되는 것을 막기 위해 깊고 깊은 사막의 골짜기로 숨어들었지만 소용없었다. 왕릉을 만들던 기술자나 화가들은 수천 년 동안 입을 닫고 세상과 격리돼 살았는데, 도굴꾼들은 다름 아닌 그들의 자손이라는 설도 있다.
한때 도굴범의 소굴로 유명했던 구르나 마을. 낮에는 밭을 갈고, 밤이 되면 무덤을 파 내려가며 대를 이어 도굴로 먹고 산 가문이 있었다고도 전해진다. '하루 종일 땅을 파봐라, 돈 한 푼 나오나'라는 말이 여기서만큼은 바뀌어야 할 것 같다. '하루 종일 땅 파면 황금이 나온다'로.
그러나 도굴되지 않은 상태로 발견된 유일한 무덤이 있었으니, 바로 그 유명한 투탕카멘의 무덤이다. 람세스 6세의 무덤을 건설하는 인부들의 집이 소년 왕의 무덤 위에 지어짐으로써 투탕카멘은 긴 세월을 안전하게 잠들 수 있었다.
투탕카멘 무덤은 따로 입장료를 지불해야 하지만 그냥 지나칠 수는 없는 일. 3300년 만에 발굴됐다는 소년 왕의 무덤은 상상했던 것보다 작았다. 카이로 박물관 2층 곳곳에 자리한 화려한 유물들이 가득 쟁여져 있던 곳이 맞나 싶을 정도로 방은 아담하게 느껴졌다. 원숭이와 태양의 배, 신들의 모습이 벽을 둘러 그려진 방에는 투탕카멘의 미라가 있었다.
대체 이 작은 방 어디쯤일까, 하워드 카터가 파내려가다 맨 처음 구멍이 뚫린 곳은. 그 구멍 사이로 새어 나온 황금빛의 정체는 무엇이었을까. 황금 옥좌였을까, 투탕카멘의 카(KA) 전신상이었을까.
나는 가만히 투탕카멘의 미라를 내려다 보았다. 저 얼굴 위에 카이로 박물관에 있던 그 화려한 황금 마스크가 씌워져 있었겠지, 세공이 화려하고 섬세한 그 황금관이 저 미이라를 품고 있었겠지, 가까스로 상상해 낸 이런 생각들을 자꾸만 밀어내고, 그 자리를 차고 들어오는 것은 따로 있었으니.
바로 꽃 한 묶음이었다. 1925년 투탕카멘의 석관을 열었을 때 카터 역시 그랬다. 삼베를 벗겼을 때 나타난 화려한 인형관보다 더 감동적인 것은 미라의 이마에 놓인 수레국화 한 묶음이었다고, 카터는 BBC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투탕카멘을 말할 때, 황금 마스크가 어떻고 어마어마한 부장품이 어떻고 할 때에는 그저 박물관에서나 볼 수 있는, 만난 적도 본 적도 없는, 나와 아무 관계없는 옛날 옛적 먼 나라 왕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의 검게 마른 이마 옆에 수레국화 한 묶음이 발견됐다는 걸 떠올리는 순간, 그는 한 세월을 살다간 가련한 18세 소년으로 다가왔다. 내가 사는 이 세상을 살다 간 소년, 이렇게 화려하게 다시 깨어나긴 했지만 영영 죽을 수밖에 없었던 평범한 인간, 이별이란 걸 견뎌야 했을 인간적인 너무도 인간적이었을 생애….
그의 어린 아내는, 남편이 죽자 슬픔을 가누며 소담한 꽃 한 다발 묶었으리라. 죽은 남편의 머리맡에 그 꽃을 내려놓고 목 놓아 울었겠지. 황금 부장품이 다 무슨 소용이랴. 수레국화 한 묶음에 어린 아내의 슬픔과 절망은 차고도 넘친다.
왕가의 계곡을 빠져나올 즈음, 아차 싶었다. 사진 한 장 남기지 못한 것이다. 입구에서부터 카메라를 맡겨야 하는 통에 절대(!) 찍어서는 안 되는 줄 알았다. 스마트폰으로 무덤 주변이라도 찍는 건데, 후회막심이다.
우리는 너른 들판을 달려, 외롭게 솟아 있는 멤논의 거상을 봤고, 람세스 3세의 장례신전 메디네트 하부도 들렀다. 작고 아담한 신전이었지만, 그곳의 상형문자나 조각들은 반죽을 이겨 넣는 떡살만큼이나 깊고도 우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