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선대원군의 사저인 운현궁. 서울지하철 3호선 안국역 부근에 있다.
김종성
1545년 이후부터 1800년까지 전 세계에서 생산된 13만7000톤의 은(銀) 중에서 6만 톤(44%)은 청나라에 유입되었다. 당시에는 은이 지금의 금이나 달러 같은 역할을 했기 때문에, 은의 유입은 무역수지 흑자를 의미했다.
청나라는 3대 수출품인 차·비단·도자기로 세계시장을 석권한 반면, 영국·미국·프랑스 등 서양열강은 마땅한 주력 품목이 없어 대(對)중국 무역에서 만성적인 적자에 시달렸다. 이 때문에, 서양열강이 아프리카·아메리카 식민지에서 벌어들인 돈이 중국에 끊임없이 흘러들어가는 구도가 계속 유지되었다.
나중에 서양열강이 아편 밀매로 방향을 돌린 것은, 정상적인 상품으로는 무역적자를 타개할 길이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그들이 아편전쟁(1840)을 일으킨 것은, 청나라가 그나마 아편무역마저 허용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전쟁에서 승리한 서양열강은 여세를 몰아 불평등조약을 강요했고, 그렇게 해서 통상관계의 룰(rule)을 바꾼 뒤에야 만성적인 무역적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서양열강은 일본을 상대로도 똑같은 방법을 구사했다. 그들은 함포를 앞세워 일본을 위협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불평등조약을 체결하여 자국에 유리한 통상관계를 만들어냈다. 당시의 서양열강은 조폭과 다를 바 없었다.
이렇게 서양열강이 비열한 방법으로 돈을 버는 모습을 지켜본 대원군으로서는 그들에 대해 부정적 시각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원군은 서양열강에 대해 우호적 입장을 견지했다. 아니, 그가 서양에 대해 우호적이었다고? 믿기지 않을지 모르지만, 분명한 사실이다.
고종 2년 8월 17일자(1865년 10월 6일) <고종실록>에 따르면, 실권자인 대원군은 경상도 해안에 표류한 미국인 3인을 구호하고 식량과 선박까지 제공하면서 귀국의 편의를 봐주었다. 또 조선 정부의 공식 일기인 <일성록>에 따르면, 고종 3년 중반에 미국 상선 서프라이즈호가 평안도 철산에 표류하자 대원군은 이들을 인도적으로 구호한 뒤 안전하게 돌려보냈다.
다만, 고종 3년에 발생한 미국 선박 제너럴셔먼호 사건의 경우는 사정이 달랐다. 훗날 개화파 지도자가 될 평양감사 박규수가 제너럴셔먼호를 격침한 것은 이 선박이 조선 영역을 불법 침입했기 때문이다. 이 배는 대동강을 따라 평양까지 깊숙이 들어갔다. 그것도 모자라 조선 관리를 폭행하고 감금하기까지 했기에, 관군은 물론 평양 백성들까지 나서서 이 배를 불태워버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렇게 대원군은 '조선 영역을 침범하지 않는 한, 서양열강을 우호적으로 대하겠다'는 입장을 취했다. 당시 동아시아 해역에서 조난을 당하는 서양 선박들이 꽤 많았기 때문에, 이런 선박들에 대해 인도적 구호를 아끼지 않겠다는 대원군의 태도는 서양열강이 고마워 할 만한 것이었다.
다만, 대원군은 통상관계에 대해서만큼은 부정적 시각을 갖고 있었다. 서양열강에 의해 중국 시장이 침탈되는 것을 똑똑히 지켜보았기 때문에, 당시로서는 그런 태도를 취할 수밖에 없었다.
'조선 영역을 침범하지 않는 한, 서양열강을 우호적으로 대하겠다'는 조선 정부의 공식 입장을 무시한 나라 중 하나가 미국이었다. 미국은 1871년 3월 7일자 서한을 통해 '문호를 개방하지 않으면 평화롭지 못한 사태가 초래될 것'이라며 사실상의 선전포고를 감행했다. 문호를 개방하라는 말은 시장을 개방하라는 뜻이었다. 신미양요는 이렇게 해서 시작됐다.
경제적 이익 없다고 판단해 개방 거부... 하지만 미국은 '전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