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3일 서울시장 야권단일후보로 선출된 박원순 시민사회 후보가 박영선 민주당 후보, 최규엽 민주노동당 후보와 손을 맞잡고 지지자들에게 인사하고 있다.
남소연
두 번째 질문, 대한민국 권력을 뒷받침하는 무기는?"모든 사람이 글자를 쓰는 세상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있는가. 글자는 무기다. 글자란 권력이 모두에게 나눠지고, 질서는 무너지고 나라는 혼돈 속으로 들어가는 게야."(정기준)훈민정음을 접한 밀본의 본원 정기준은 위기감에 휩싸인다. 성리학이라는 앞선 사상으로 단련되고 또 선택된 소수의 선비들만이 사대부로서 나라를 이끌 수 있다고 믿어온 그였다. 그런 그에게 누구나 글을 읽고 쓸 수 있는 세상은 곧 누구나 권력을 향해 달려드는 아비규환의 지옥을 떠올리게 했다. 결국 그는 새로운 글자의 반포를 막기 위해 모든 것을 바치기로 결심한다.
비록 그는 끝까지 백성을 믿지 못했다는 점에서 시대의 한계에 갇힌 인물이었지만, '모든 사람이 글자를 쓰는 세상'이 가져올 엄청난 변화를 내다봤다는 점에서 대단한 통찰력을 가진 인물이기도 했다.
문득 궁금해졌다. 600년 전 조선에서 글자가 권력을 뒷받침했듯, 오늘 대한민국에서 권력을 뒷받침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다시 말해, 권력을 얻기 위해 국민이 반드시 손에 넣어야 하는 것은 무엇일까. 지식과 정보일까. 아니면, 언로(言路)일까. 그런 정도라면 이미 충분하지 않은가. 아니, 혹시 알맹이가 없는 껍데기만을 쥐고서 모두 손에 넣은 양 착각에 빠져 있는 것은 아닐까. 보편적 복지 체계는 또 어떤가. 일자리가 더 급한 것은 아닐까. 노동시간을 줄여 충분한 휴식을 얻는 것도 절실한 문제가 아닐까.
어쩌면 그것이 무엇이든, 혹시 우리 스스로 우리들 자신을 믿지 못하거나, 또는 그것이 가져올 변화가 두려워 손에 넣기를 망설이고 있는 것은 아닐까. 마치 드라마 속 정기준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당신의 생각이 궁금하다. 당신은 그 무기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세 번째 질문, 우리 앞을 막고 선 '시대의 한계'는?"그들의 욕망은 결국 정치를 향하게 돼 있어. 국가의 정책에 관여하려 들 테고 나아가서 그들의 지도자를 스스로 선출하려 들 것이다. 동서고금에 그런 무책임한 제도가 어찌 있을 수 있단 말이냐. 역사를 발전시키는 건 저 무지몽매한 군중이 아니라 책임을 질 수 있는 몇몇이다."(정기준)그는 묻는다. 동서고금에 그런 무책임한 제도가 어찌 있을 수 있느냐고. 여기서 새겨봐야 할 대목은 질문 그 자체가 아니라 그런 질문을 던진 정기준의 시대적 한계다. 정기준과 이도 모두 600년 전의 인물이었다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의 놀라운 통찰을 보여주지만, 결국 마지막 순간에는 어쩔 수 없는 시대의 한계 앞에서 길을 몰라 헤매곤 한다.
당연한 일이다. 이도가 아무리 백성을 어여삐 여겼던들 스스로 계급 질서를 무너뜨리며 임금의 자리에서 물러날 수는 없지 않았겠는가. 어느 시대에든, 또 누구에게든 넘기 힘든 시대의 벽은 존재하기 마련이며, 그것을 뛰어넘을 때 비로소 새로운 시대가 열리는 법이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 앞을 가로막고 선 '시대의 한계'는 무엇일까. 우리만의 글자는 결코 만들어질 수도, 만들어져서도 안 된다고 믿었던 600년 전 조선의 지식인들처럼 혹시 우리도 너무도 익숙한 낡은 틀 안에 갇힌 채 새로운 것을 꿈꾸고 있지 못한 것은 아닐까.
가령, 수천만 원의 빚을 안고 이제 막 사회에 첫 발을 뗀 스물다섯 살 청년들을 모아 국회로 보내는 것은 어떨까. 고용노동부 장관 자리에 앉히는 것도 괜찮다. 중고등학생들에게 투표권을 주는 건 어떨까. 한 달에 한 번씩 온라인 국민투표를 하는 건 무리일까. 또 인터넷 커뮤니티를 만들 듯 누구라도 쉽게 정당을 만들거나 선거에 출마할 수 있도록 하는 건 어떨까. SNS 정당처럼 말이다. 이 모든 것들이 그저 현실을 모르는 이야기일 뿐일까.
그때도 그랬다. 하지만 이도는 천출이었던 장영실을 자신의 곁에 두며 종3품 대호군의 지위에까지 오르게 했고, 세금제도 개혁을 위해 17만여 명(노비와 여성을 뺀 거의 모두)에 달하는 백성에게 가부 의견을 묻는 우리나라 최초의 국민투표를 실시하기도 했다. 그리고 그는 마침내 우리의 글자를 만들어냈다.
대한민국 정치권이 변화와 혁신을 목놓아 외치면서도 정작 눈에 보이는 것은 갈 곳 모르는 앙상한 깃발뿐인 오늘의 현실은 또 한번 쓴웃음을 짓게 만든다. 그들 모두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