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총독부는 광견을 박멸하고자 했다. 그 조치란 예방조치와 함께 길에 명찰없이 다니는 개를 모두 죽이는 것이었으니 실제는 광견과 상관없이 죽었던 개가 훨씬 많았다. 사진은 집을 지키는 충성스러운 견공.
김종성
1909년 축견단속지침이 마련된 이후 개들은 줄곧 광견병 숙주를 지닌 위험군으로 분류됐다. 개를 기르는 사람은 반드시 자기 이름과 주소를 표찰 또는 고리에 달아서 개 목에 달아야 하고, 만약 표찰이나 고리가 없으면 주인 없는 개로 간주해 죽일 수 있도록 했다.
개를 죽이는 임무는 백정에게 맡겼는데, 이들의 행패가 도를 넘었다. 표찰이 없다 싶으면 사정없이 죽였고, 잠시 집에서 나온 개도 사정을 두지 않았다.
표찰이 있다 해도 죽여 놓고 모른 척 하기 일쑤였다. 심지어는 주인 있는 집에 들어가 개를 죽인 뒤 끌고 나오기도 했다. 조금 권세가 있다 싶으면 모른 척하고, 이름 없는 집 같으면 표찰 유무와 상관없이 개를 죽였으니 개 주인과 마찰이 잦았다. 개를 죽이려는 주인을 오히려 때리기까지 했으니 '개백정'이라는 말은 바로 이 때 나온 말이겠다.
무지막지하게 개를 때려잡은 백정은 사람에게도 종종 행패를 부렸으니 당시 언론들 또한 백정의 모습에 혀를 '끌끌' 차는 지경이었다. 1922년 벌어진 남교화 정마신 사건은 당시 개 퇴치가 어떠한 상황에서 벌어졌는지 잘 보여준다.
"13일 저녁에 야견을 잡으러 다니는 백정들이 남교화의 집에 들어와서 그 집의 먹이는 개를 잡어감으로 남교화의 모친이 죽은 개를 안고 놓치 아니함에 백정은 늙은이의 멱살을 잡고 떼밀어 넘어뜨림으로 남교화는 자기의 모가 욕 당하는 것을 분히 여겨 백정을 뺨을 때렸는데…이 급보를 들은 순사들은 잠을 깨여 급히 현장에 달려가서…개잡든 몽둥이로 남교화의 허리를 몹시 쳐 그 자리에서 혼도하게 하고 곁에 선 사람들을 무수히 난타함으로 동리사람들은 겁이 나서 달아나려 함에 백정들은 그들을 에워싸고 달아나지 못하게 하고 풍도는 칼을 빼어 정마신의 어깨를 쳐 왼편에 삼분(약 0.9cm) 가량의 상처를 낸 후에 전기 이명천을 현장에서 포승으로 결박하고 구두발길로 무수히 차서 기절케 하고 칼로써 머리를 쳐 골이 나오게 하였다 한다." - <동아일보>(1922년 6월 21일)이 같은 행패는 1930년대 후반에 들어서도 여전했다. 1937년 7월 8일자 <동아일보>에 보면 남해지방에서 주인 없는 개를 잡으러 다니던 백정 5, 6명이 한 노인의 집에 들어갔다. 노인이 주인인 게 뻔한 데도 백정들은 개를 잡아가려고 했다. 개를 지키기 위해 노인은 개를 꼭 안고 있었고, 백정들은 아랑곳없이 개를 찍기 위해 쇠갈고리를 들었는데, 그만 노인을 찍어버리고 말았다. 다리에 7cm 정도 상처가 날 정도로 중상이었다. 이와 같은 기사들을 보면 일제강점기 내내 개를 기르는 집에선 개잡는 백정들에게 시달린 듯하다.
항상 명찰을 달고 있어야 했으며, 잠시만 집 밖을 나서도 백정에게 박살나던 때였으니, 개에게 일제강점기란 '중세암흑기'였다. 집에서 기르는 개에 대한 단속규칙이 만들어진 게 1909년. 그 해에만 때려잡은 개가 전국에서 1127마리였다. 1926년에 이르면 한 해에 2만 마리가 넘게 때려 잡혀 고기로 팔렸다.
개보다 훨씬 무섭고 강력한 적은 바로 '늑대'이런 때였으니 개가 집 밖을 어슬렁거리기는 쉽지 않았을 터. 단 예외가 있었으니 광견이었다. 미친 개쯤 돼야 백정 무서워하지 않고 거리를 다닐 수 있었을 테고, 그런 개의 눈에 달리는 자전거들이 먹잇감이 됐을 테다.
"지난 7일 오후 1시경 경북 김천 금정 본보 지국 앞 통로에서 미친개 한마리가 나타나자 부근에 있는 개들이 10여두나 모여들어서 일대 교전을 하야 소동을 일으키므로 주민들은 전율하고 있든 차에 16세 되는 소년 한 명이 자전거를 타고 그 앞을 지나다가 미친 개에게 무수한 교상(咬傷, 동물에게 물려 생긴 상처. 기자주)을 당하였는데..." - <동아일보>(1934년 2월 10일)1937년 기준으로 조선에 등록된 개는 대략 13만 마리. 매년 1만에서 2만 마리 정도 되는 개가 때려 잡혔다. 엄청난 숫자였다. 이런 상황이었으니 길거리에서 개와 자전거가 만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을 터. 당시 기사에서 갑자기 길에 뛰어들거나 차에 받혀 죽은 개가 대부분 광견으로 밝혀진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렇다면 일제강점기 때 자전거를 타다가 혹시라도 개를 만난다면 정말 꽁지가 빠져라 타야 하지 않았을까. 개 전문가들은 혹시라도 자전거를 타다가 개를 만나거든 천천히 페달을 멈추라고 권하지만 과연 '으르릉' 거리는 개를 만났을 때 그런 용기를 낼 수 있을지. 대부분의 개는 광견병 위험종자로 분류해 관리하던 때였으니 자전거 여행자 처지에선 '개가 없으니 좋다'고 할지도 모르겠으나 그렇진 않았다. 당시엔 개보다 훨씬 무섭고 강력한 적이 있었다. 바로 늑대였다.
1927년 2월 19일 전북 순창에 살던 최양옥은 자전거를 타고 가다 늑대를 만난다. 자전거 여행 중 덩치 큰 개를 만나면 다리에 힘이 풀리고 헛발질을 하게 된다는 이들이 있다. 개도 그러한데 하물며 늑대라면야. 결국 정신을 잃고 쓰러진 최양옥을 늑대가 할퀴고 무는 모습을 길 가던 사람이 구해줬다는 내용을 당시 <동아일보>가 전한다.
1920년 7월 경북 달성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1970년 10월 24일자 <동아일보>는 이상오가 쓴 <한국야생동물기>를 인용해 그때 상황을 전했다.
"수렵가 이상오씨의 한국야생동물기에 의하면 1920년 7월 경북 달성군 화원면 우경동에서 이모씨가 오후 6시경 자전거를 타고 집에 가다 길에서 늑대를 만나 소리치자 늑대가 오히려 이씨를 뛰어넘고 자전거를 계속 쫓아와 이씨가 급히 나무를 껴안고 멈추자 겨우 늑대가 따라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 <동아일보>(1970년 10월 24일)해방 이전만 해도 늑대는 꽤 흔한 동물이었다. 황해도와 경상북도, 전라북도 등 깊은 산을 낀 지역 곳곳에서 출몰했다. 1930년 무렵엔 경북 달성군과 고령군 일대에 수백 마리 늑대가 나타났을 정도였다.
갇혀 지낸 개와 이제 집밖으로 나온 자전거, 다른 듯 닮은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