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근대시인 12명이 모인 ‘거미동인’들이 펴내는 세 번째 시집 <슬픈 근대>
심지
"이제 시는 발 벗고 자본과 화해해야 할까? 그러면 그는 받아줄까? 저 팔뚝 굵은 자본의 눈길을 받을 방법은 있을까? 잘 생긴 드라마 주인공의 소품으로 지나가듯 노출된 시집 한 권은, 몇 십 년간 시에 매진한 시인이 평생 독자를 만나 횟수를 단숨에 넘어선다. 이것이 화해의 방법인가?... 시가 자본에 종속되면서 훌륭하게 멸종하는 성공사례는 아닐까?"-'여는 글' 몇 토막
시인 12명이 모인 '거미동인'들이 펴내는 세 번째 시집 <슬픈 근대>(심지). 이 동인 이름 '거미'(巨微)는 크고 작다는 것을 뜻하는 공통분모다. 여기서 '크다'는 것은 현재에서 미래로 나아가는 새롭고도 큰 희망이다. '작다'는 것은 현재에서 과거로 내려가 흘러간 세월이란 거울에 나를 비추는 자화상이다.
이들은 시가 형벌이라고 말한다. "돈과는 멀고 사회에서 인정받는 방법 또한 묘연"하지만 "시가 밤마다 꿈에 나타나 나를 괴롭히는 첫사랑의 귀신"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우리는 왜, 시를 쓰고, 쓰려고 하고, 잊지 못하고, 누구는 잊으려 노력하는지" 답을 찾을 수도 없다. 그래도 시를 쓴다. 시는 "닳고 닳아 손에 짝 붙는 화장실 손잡이 같은" 것이므로.
이 동인시집에는 시인 조영여 '피어라 꽃이여' 등 5편, 이민호 '슬픈 근대' 등 5편, 김영환 '초생달' 등 6편, 김남기 '노래' 등 5편, 신효석 '생선종이' 등 4편, 임동준 '하이힐' 등 5편, 이화숙 '소리' 등 6편, 박광배 '나는 둥그런 게 좋다' 등 7편, 전용욱 '추석' 등 3편, 양선 '박쥐' 등 5편, 김병호 '장마' 등 5편, 김민식 '빈 집' 등 6편이 물질자본주의가 숨기고 있는 안다리를 툭툭 차고 있다.
"십대 때나 지금이나 이 세상이 싫다 / 서른 무렵이었을까 / 아버지는 내게 만고의 역적 놈이라 했다 / 하여간 싫은 걸 어쩌나 / 아버지 풀 매는 것도 거슬렸다 / 멀쩡한 풀 왜 뽑나 / 매사 사사건건 거슬릴 뿐이다 // 하지만 내가 좋아하는 것은 / 여자들 동그란 가슴과 동그란 엉덩이가 좋았다 / 둥글게 휘도는 강물이 좋았다" -89쪽, 박광배 '나는 둥그런 게 좋다' 몇 토막거미동인시집 <슬픈 근대>에서 가장 흥이 나게 읽은 시가 시인 박광배가 '둥금의 미학'에 대해 쓴 시다. 시인은 어릴 때부터 모가 나고, 거칠고, 날카로운, 그야말로 "만고의 역적 놈" 같은 이 세상이 싫다. 시인은 타고날 때부터 둥글고, 부드럽고 "막천으로 대강 만든 바지가 좋았"다. "풀이 좋고 숲이 좋"은 것도 "바르게 반듯하게 살아가는 / 저 놈들 세상"이 몹시 싫기 때문이다.
거미동인들이 펴낸 세 번째 시집 <슬픈 근대>는 천민자본으로 넘쳐나는 이 세상을 겨누는 '시의 칼날'이자 그 천민자본을 싹둑 베어내고, 그 자리에 새로운 '시의 세상'을 열려는 야무진 손짓 발짓이다. 물질이 아무리 시와 사람을 아주 우습게 깔보는 시대라지만 시를 무기로 삼아 나아가는 거미동인들이 있는 한 저 뻔뻔스런 물질이 언젠가 시와 시인 앞에 무릎을 꿇지 않겠는가.
"송해 할아버지는 사천 만에게 대놓고 거짓말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