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하남시에 있는 광주향교. 향교는 조선시대의 중등 교육기관.
김종성
여기에 소개된 암기왕들의 사례는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현대인들은 흉내도 낼 수 없는 기억력이나 암기력을 바탕으로 직무를 훌륭하게 수행한 인물들의 사례를 사료 속에서 심심찮게 발견할 수 있다. 이는 옛날 사람들의 평균적인 암기력이 현대인들보다 훨씬 더 좋았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옛날 사람들의 암기력이 탁월했던 데는 몇 가지 요인이 있었다. 첫째, 인쇄술이 발달하지 않아 서적을 구하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책을 살 수 없는 사람들은 책을 베끼거나 암송하는 수밖에 없었다. 또 정보를 배포하는 쪽에서도, 책자 형태로 알리기보다는 사람에게 암송을 시키는 편이 유리할 때가 많았다.
둘째, 반복학습과 암송을 통해 문리(文理)를 깨우치도록 하는 학습법이 보편적이었기 때문이다. 오늘날에는 암기보다는 이해나 분석의 중요성이 훨씬 더 강조되지만, 옛날에는 이해나 분석 못지않게 암기의 중요성도 크게 강조되었다. 옛날 사람들은 암기를 통해 전체적인 윤곽을 잡고 그렇게 함으로써 이해력을 높이는 데 중점을 두었다.
셋째, 개인의 사회생활에 요구되는 정보량이 오늘날보다 적었기 때문이다. 오늘날처럼 정보가 폭주하는 시대에는, 아무리 머리가 좋은 사람이라도 전화번호 몇 개도 기억하기 힘들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에는 정보를 잘 분류해두는 것이 더 중요하다. 하지만, 정보량이 적은 옛날에는 정보의 전부 혹은 상당부분을 머릿속에 넣고 다니는 게 가능했다.
이상의 세 가지 요인은 한·중·일 3국에 공통되는 것들이다. 이 외에, 한국·일본에만 해당하는 요인이 또 있었다. 상당량의 정보가 모국어가 아닌 외국어로 기록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해보다는 암기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이 생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한국인이나 일본인이 아무리 한문을 많이 배우더라도, 중국인보다 한문을 더 잘 이해할 수는 없었다. 대학자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유명한 문장가였던 유몽인도 한글 번역문을 참고하면서 중국 서적을 읽었노라고 <어우야담>에서 회고한 바 있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인이나 일본인이 한문으로 적힌 정보를 많이 습득하자면, 가급적 많이 읽고 많이 외우는 것 외에는 도리가 없었다. 문장을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할 바에는 차라리 암기해버리는 게 더 나은 경우가 많았던 것이다.
현대인들보다 훨씬 스마트한 궁녀 소이서당 훈장들이 "뜻을 몰라도, 반복해서 계속 읽어라"라며 "열번 백번 읽다 보면, 자연히 문리가 트일 거야"라고 말한 것은 그런 사정을 반영하는 것이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살다 보니, 옛날 사람들의 암기력이나 기억력이 현대인들보다 훨씬 더 좋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궁녀 소이를 비롯한 옛날 사람들과 비교할 때, 현대인들이 훨씬 더 많은 정보를 갖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현대인들이 옛날 사람들보다 머리가 더 좋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현대인들은 머리가 아닌 컴퓨터나 스마트폰에 정보를 저장해두기 때문이다.
주기억장치는 머리여야 하고, 컴퓨터나 스마트폰은 어디까지나 보조기억장치여야 한다. 그러나 주기억장치와 보조기억장치가 서로 뒤바뀐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현대인들은 신체 외부의 인공적인 장치들에 자신들의 기억을 의존하고 있다.
현대인들은 1시간만 정전이 되거나 네트워크가 마비돼도 정보활동을 제대로 수행할 수 없다. 그러니, 컴퓨터나 스마트폰을 모르는 궁녀 소이가 현대인들보다 훨씬 더 스마트하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댓글
kimjongsung.com.시사와역사 출판사(sisahistory.com)대표,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친일파의 재산,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 등등.
기사를 스크랩했습니다.
스크랩 페이지로 이동 하시겠습니까?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