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천 평화포럼
신광태
1950년에 발발한 한국전쟁에서 가장 전투가 치열했던 곳이 바로 이곳 화천이다. 그러나 얼마나 많은 젊은이들이 전사를 했는지 정확한 기록은 한국전사(戰史)에도 없다. 이유는 화천으로 진입하는 길목이 첩첩산중이라 종군기자의 출입이 통제되었기 때문으로 풀이 된다. 그러면 왜 이곳 화천에서 전투가 그렇게 치열했는지 주목할 필요가 있다.
1944년 일제에 의해 준공된 화천발전소는 당시 기간산업으로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했다. 때문에 이 발전소 탈환을 위해 1953년 한국전쟁이 휴전되기까지 중국군 3만여 명이 수장이 될 정도로 전투가 치열했던 곳이 이곳 화천이다.
그러나 전사(戰史)에는 적군의 사망숫자만 언급 되었을 뿐 유엔군을 비롯한 아군의 피해에 대한 공식적인 발표는 없다. 다만 추측에 의해 피아 모두 10만여 명의 젊은이들이 화천 전투에서 목숨을 잃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에 화천군은 2009년 세계 30여 개국에서 보내온 탄피를 녹여 37.5톤 규모의 평화의 종을 만들고 세계평화는 이곳 화천에서 시작된다는 메시지를 전 세계에 알렸다. 그리고 지난해 한국전쟁 60주년을 맞아 한국전쟁 중 화천에서 희생된 꽃다운 젊은 넋(피아 구분없이)들을 위한 위령제를 기획했으나 천안함 사건 등 국내정세에 의해 무산되었고 지금은 2012년 이들 영혼들을 위한 대규모 위령제를 비롯해 위령탑 건립이 타진되고 있다.
위령탑 건립 조건은 군(郡에)에서 부지를 제공하고 건립은 세계 각지에서 뜻을 같이한 사람들의 성의를 모아 추진하는 것으로 가닥을 잡았다..
화천 평화포럼이 열린 자리에는 중국을 대표해 마카오 차이나(지앙펭), 홍콩 차이나(보양), 중국대표(장유안유안) 3명이 참여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이날 포럼 자리에서 파로호에 대한 이야기가 언급됐다. 파로호라는 호수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이들(중국인)에게는 다소 불편할 수 있는 대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