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하 시인(자료사진)
남소연
바로 그 명단이 김지하의 시상(詩想)을 자극했다. 재벌, 국회의원, 고급공무원, (군)장성, 장차관이 당시 특권층 '오적(五賊)'이었다. 정인숙 사건은 풍자 노래 뿐 아니라 사회비판을 내용으로 하는 담시와 신문 연재소설에서도 소재가 돼서 꼬리를 물고 파장이 커졌다. 그 중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김지하의 담시 '오적'이다.
오적은 당시 권력층의 부패상을 전통적 해학과 풍자로 사회현실을 날카롭게 비판한 꽤 긴 시다. 이로 인해 담시라는 독창적인 시 장르가 생기기도 했다. 박정희 정권 아래서 썩어가는 사회적 타락상을 적나라하게 비판한 담시 오적에 바로 정인숙의 이름이 등장한다.
"… … 또 한 놈이 나온다. 국회의원 나온다. 곱사같이 굽은 허리, 조조같이 가는 실눈, 가래 끓는 목소리로 응승 거리며 나온다 털 투성이 몸둥이에 혁명 공약 휘휘 감고 혁명 공약 모자 쓰고 혁명 공약 배지차고 가래를 퉤퉤, 골프채 번쩍, 깃발같이 높이 들고 대갈일성, 쭉 째진 배암 혓바닥에 구호가 와그르르 혁명이닷, 구악은 신악으로! 개조닷, 부정축재는 축재부정으로! 근대화닷, 부정선거는 선거부정으로! 중농이닷, 빈농은 이농으로! 건설이닷, 모든 집은 와우식으로! 사회 정화닷, 정인숙을, 정인숙을 철두철미 본받아랏! 궐기하랏, 궐기하랏! 한국은행권아, 막걸리야, 주먹들아, 빈대표야, 곰보표야, 째보표야 … … " 담시 오적은 국회의원을 5·16 쿠데타집단과 동일시한 것 같다. 사회정화를 정인숙 사건처럼 하라는 것은 눈엣 가시같이 굴면 없애버린다는 얘기다. 오적은 특히 개발독재 아래서 권력집단과 특혜 층을 5개 그룹으로 정하고 그들의 행태를 풍자했다.
이들의 한자 표기를 모두 개 견(犬)자가 들어가는 독특한 한자로 써서 인간의 탈을 쓴 짐승으로 등장시켰다. 짐승과도 같은 다섯 도적들이 서울 한복판에서 도둑질대회를 벌이는 것으로 사건을 전개시키면서 고대 의인소설처럼 이들을 차례로 풍자해 나간다. 오적이라는 제목은 을사국치조약 때 나라를 팔아먹은 을사오적에서 따 온 것이기도 하다. 다섯 짐승들에 대한 첫 머리 묘사만 들여다 보면 이 담시의 내용을 짐작할 수 있다.
"장충동 약수동 솟을대문 제멋대로 와장창 저 솟고 싶을 대로 솟구쳐 올라 삐까번쩍 으리으리 꽃궁궐에 밤낮으로 풍악이 질펀 떡치는 소리 쿵떡 예가 바로 재벌, 국회의원, 고급공무원, 장성, 장차관이라 이름하는, 간뗑이 부어 남산만하고 목 질기기 동탁 배꼽 같은 천하흉포 오적의 소굴이렷다. … 첫째 도둑 나온다 재벌이란 놈 나온다 돈으로 옷해 입고 돈으로 모자해 쓰고 돈으로 구두해 신고 돈으로 장갑해 끼고 … 저놈 재조 봐라 저 재벌놈 지조 봐라 장관은 노랗게 굽고 차관은 벌겋게 삶아 … 셋째 놈이 나온다 고급공무원 풍신은 고무풍선, 독사같이 모난 눈, 푸르족족 엄한 살, … 어허 저놈 봐라 낯짝 하나 더 붙었다. … 한손은 노땡쿠 다른 손은 땡큐땡큐 … 넷째 놈이 나온다 장성놈이 나온다 키 크기 팔대장성, 제 밑에서 졸개행렬 길기가 만리장성 … 엄동설한 막사없어 얼어죽는 쫄병들을 일만 하면 땀이 난다 온종일 사역시켜 … 마지막 놈 나온다 장차관이 나온다 … 추접 무비 눈꼽 낀 눈 형형하게 부라리며 왼손은 골프채로 국방을 지휘하고 오른손은 주물럭주물럭 계집 젖통 위에다가 증산 수출 건설이라 깔짝깔짝 쓰노라니 … 굶더라도 수출, 안팔려도 증산 … " '오적'이 신민당 기관지 <민주전선>에 재수록되자 문제 커져 담시 오적이 처음 <사상계>1970년 5월호에 실렸을 때만해도 서점에서 이 잡지를 수거하고 시판하지 않는 선에서 사건이 일단락되는 듯했다. 그런데 신민당의 기관지 <민주전선>에 재수록되면서 문제가 커졌다. 민주전선의 압수에 그치지 않고 시인 김지하, <사상계> 발행인 부완혁, 편집장 김승균이 6월 2일 즉각 반공법 위반 혐의로 구속됐다. <사상계>는 그때 휴간했으나 끝내 재발행하지 못하고 폐간되고 말았다.
담시 '오적'에 대해 공안당국 뿐아니라 당시 재판부 마저도 "북조선을 이롭게 하는 것"이라고 유죄판결의 이유를 설명했다. 과연 그럴까, 재심 청구를 하거나 '역사 재판'을 해봐야 할 일이다. 당시 보수적인 지식인들조차 이 시가 비뚤어져만 가는 시대상에 대해서 문학적으로 풍자한 가치있는 작품이라고 평가했다.
민주주의가 보장하는 표현 자유의 영역 내에 있을 뿐 아니라 해외에 번역을 제대로 해서 널리 읽혔더라면 노벨문학상 감이라는 얘기도 많았다. 김지하는 그 후에도 또 다른 담시 '비어(蜚語)' 등을 지어 박정희 정권의 부정부패상을 풍자하고 비판했다.
정권 측은 1974년 7월 그의 시가 "북괴의 선전 활동에 동조한 것"이라며 그에게 반공법 위반 혐의로 사형선고를 내렸다. 이 소식이 알려지자 국제적인 김지하 구명운동이 벌어졌다. 프랑스의 사회철학자며 문인인 사르트르와 보봐르를 비롯한 많은 세계적 작가들이 석방호소문에 서명했다. 김지하는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지만 이는 박정희 정권이 자행한 가장 심각한 문화탄압이었다.
정인숙은 자유당 정권 아래서 대구시 부시장까지 지낸 고위공무원의 딸로 어렸을 적만 해도 유복한 집에서 자랐다. 아버지가 4·19 혁명 후 퇴직당하면서 가세가 기울기 시작했고 자신도 대학 입시에서 낙방, 진로가 꼬이기 시작했다. 본인의 장래 희망은 배우와 모델. 그 꿈 때문에 서울 충무로 영화가를 맴돌다가 1963년 시나리오 작가 장사◯을 만나 동거생활을 했다.
이들의 동거생활은 순탄하지 못했고 관계가 나빠졌다. 그때 정인숙은 한남동에서 요정을 경영하던 김아무개 마담을 만나게 되고 그후 요정 호스티스의 길로 빠져든다. 그녀는 타고난 미모와 매너로 고급요정의 요화로 소문나기 시작했다. 당시 정계와 재계의 거물들이 드나들던 고급요정 선운각과 김 마담의 한남동 요정이 그녀의 주 무대였다. 거기서 그녀는 재벌과 권력자들의 노리개감으로 전전했다.
그녀는 죽기 전 주변 사람들에게 그래도 가장 그리운 남자는 장사◯이라고 말하곤 했다. 권력자와 재벌의 '성 노예' 노릇을 했지만 어렸을 적 자유롭게 만난 남자가 그녀에겐 가장 사랑에 가까웠다.
아들 낳은 정인숙 대통령 선거 1년 앞두고 해외로 내보내